박인로(朴仁老)
1. 기본정보
박인로(朴仁老,1561~1642)는 조선 중기 무신으로 가사 〈누항사(陋巷詞)〉, 〈선상탄(船上嘆)〉등을 남긴 조선조의 대표적인 시가 작가이다. 특히 그의 가사 〈누항사〉는 구체적인 경험을 일상어로 묘사함으로써 사실성을 띤다는 점에서 주목받아왔다. 박인로의 작품들은 사대부의 도학적 문학관이 주류였던 조선 전기와, 사실적이고 서민적인 경향이 지배적인 조선 후기를 이어주는 교량적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조선 중기 시가의 중요 작품들로 평가받는다.
2. 작가 및 생애
2.1. 생애 및 관료 생활
박인로는 1561년 경상도 영천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호는 노계(蘆溪)로 널리 알려져 있다. 박인로는 한미한 양반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그가 13세에 지었다는 한시 〈대승음(戴勝吟)〉이 그의 문집에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양반으로서 최소한의 교육은 받으며 성장하였음을 알 수 있다. 박인로가 32세(1592)가 되던 해 임진왜란으로 고향이 침략 당하자, 그는 강좌절도사(江左節度使) 성윤문(成允文,?~?)의 막하에 들어가 말단 군사로 일하게 된다. 이때 성윤문의 명에 따라 가사 〈태평사(太平詞)〉를 지으니, 이것이 그의 공식적인 작품 활동의 출발인 셈이다. 39세(1599) 무과에 급제하여 무관으로서 관직생활을 시작한 박인로는, 수문장, 선전관 등을 역임하였고 1605년 통주사(統舟使)라는 직함을 얻어 부산으로 내려갔다. 이때 부산으로 내려가는 배 위에서 가사 〈선상탄(船上嘆)〉을 창작하였다. 이 벼슬을 끝으로 그의 관직 생활은 막을 내린다. 이후 그는 무인으로서의 삶을 버리고 유학자들의 자취를 좇으며 선비로서 여생을 보냈다. 박인로는 1642년 82세의 일기로 세상을 떴으며, 그의 문집 《노계집(蘆溪集)》에 한시 109수, 시조 67수, 가사 9편이 전한다.
2.2. 교유관계와 문학 활동
박인로의 교유관계는 그의 문학 활동과 긴밀한 상관관계를 갖고 있다. 박인로는 51세(1611)에 조선 중기의 명신 한음 이덕형(李德馨, 1561~1613)을 찾아가 교유를 잇고 그 과정에서 가사 〈사제곡(莎堤曲)〉과 〈누항사(陋巷詞)〉, 시조 〈조홍시가(早紅詩歌)〉 4수를 지었다. 이후 이덕형은 박인로를 조정에 천거하기도 하는 등 박인로의 든든한 후원자 역할을 한다. 이 밖에도 박인로는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 한강(寒岡) 정구(鄭逑,1543~1620),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1491~1553),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1554~1637) 등 명망이 높은 유학자들의 자취를 좇으며 학문을 닦고 작품을 창작하였다. 이 인물들은 대부분 그 당시 학문적·정치적으로 명망이 드높았던 유학자들로서, 벼슬이나 학식 면에서 상대적으로 아래에 놓이는 박인로가 그들을 따르는 형식인 종유(從遊)의 방식으로 교유가 이루어졌다. 교유 관계를 맺고 있었던 여러 사람들로부터 그는 ‘노래를 잘 하는 사람(善歌者)’이라는 평을 받았고, 박인로는 그들의 명에 따라, 혹은 대작(代作)의 형태로 상당수의 국문시가를 창작하였다.
3. 작품세계
박인로는 총 67수의 시조와 9편의 가사, 109수의 한시를 남겨 시가문학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는 당시 명망이 높은 유학자들과 왕래하면서 그들과 관련된 시조나 가사 등의 국문시가 작품들을 상당수 창작하였고, 이러한 작품들에는 대체적으로 성리학의 이념에 충실한 화자의 목소리가 강하게 투영되어 있다. 박인로의 작품 곳곳에는 선비로서 유교적 규범을 충실히 따르고, 안빈낙도(安貧樂道:가난한 생활을 하면서도 편안한 마음으로 도를 즐겨 지킴)를 실천하려는 의지가 담겨 있다.
3.1 가사
박인로는 총 9편의 가사를 남겼다. 이 중 교유 과정에서 창작된 작품들은 총 7편이다. 〈누항사〉와 〈사제곡〉은 이덕형과의 관계에서 지은 것이고, 〈입암별곡(立巖別曲)〉은 장현광과 교유하며 지은 작품이다. 정구를 따르며 지은 〈소유정가(小有亭歌)〉, 성윤문의 명을 받아 지은 〈태평사〉, 영남 안절사(按節使)였던 이근원(李謹元)의 덕치(德治)를 기려서 지은 〈영남가(嶺南歌)〉, 이언적의 유지를 흠모하며 지은 〈독락당(獨樂堂)〉도 이에 해당한다. 이 밖에도 박인로가 자신의 은거지의 아름다움과 생활을 노래한 〈노계가(盧溪歌)〉와 무인으로서의 우국충정(憂國衷情)을 담은 〈선상탄〉이 있다.
〈누항사〉는 박인로가 임진왜란에 참여한 후 고향에 돌아와 생활하던 중 한음 이덕형이 산촌생활의 곤궁한 형편을 묻자 이에 답하여 지은 작품이다. 가난하지만 이를 원망하지 않고 자연을 벗 삼아 안빈낙도하는 즐거움을 담고 있다.
〈선상탄〉은 임진왜란이 끝난 후 전운이 감도는 부산진에 내려온 박인로가 왜적에 대한 비분강개와 평화에 대한 염원을 읊은 가사이다. 작품에는 왜적에 대한 적개심, 임금을 걱정하고 그리워하는 연군의 정, 태평성대를 간절히 희구하는 마음 등이 잘 어우러져 나타나 있다. 이 작품은 그의 또 다른 전쟁가사인 〈태평사〉와 함께 전쟁 체험을 담은 대표적인 문학작품으로 손꼽힌다.
3.2 시조
박인로의 시조 67수 중, 충·효와 같은 유교적 덕목을 담은 교훈시조 작품들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그의 시조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으로는 〈오륜가〉 25수와 〈조홍시가〉 4수를 들 수 있다. 〈조홍시가〉는 박인로가 1601년에 창작한 연시조이다. 이덕형이 도체찰사로서 경북 영천에 이르렀을 때에 박인로에게 홍시를 보내자 그 자리에서 이 시조를 지은 것이라 한다. 주제는 효성이며, 중국 삼국시대에 육적(陸績)의 회귤(懷橘)의 고사를 연상하고 노래한 것이다. 이 작품은 《노계집(蘆溪集)》 권3에 실려 있고, 《청구영언》 · 《해동가요》 등의 가집에도 전한다.
(현대역)
쟁반에 놓인 조홍감이 곱게도 보이는구나
유자가 아니라도 품음직도 하다마는
품어가도 반길 사람이 없어 그것을 서러워하노라
(원문)
盤中(반중) 早紅(조홍)감이 고아도 보이ᄂᆞ다
柚子(유자) 안이라도 품엄 즉도 ᄒᆞ다마ᄂᆞᆫ
품어 가 반기리 업슬ᄉᆡ 글노 설워 ᄒᆞᄂᆞ이다
4. 특징 및 의의
박인로는 임진왜란 이후 조선 중기 시가문학의 새로운 담당층으로 부상한 재지사족 작가로서 선구적인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그는 동시대의 작가인 송강 정철이나 고산 윤선도와 같은 정통 사대부와는 그 처지에서 엄연히 구분된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박인로의 작품에 빈번하게 나타나는 안빈낙도의 형상은 중앙 관직에 나아갈 수 없는 재지사족으로서, 유일하게 선택할 수 있는 유학자적 삶의 양상으로 이해되어 왔다. 이는 조선 전기의 사대부들이 정치현실과의 갈등에서 항구적 조화의 공간인 자연을 선택하는 것과는 다른 지점이다. 한편 가사문학 작가로서 박인로의 대표작 〈누항사〉는 궁핍한 현실에 대한 사실적인 서술로 조선 후기 가사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된다.
5. 기타사항
5.1. 번역현황
5.1.1. 영어
Peter. H. Lee, A History of Korean Literatur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3.
Kevin Orourke, The Book of Korean Poetry: Songs of Shilla and Koryo, University of Iowa Press, 2006
Sung-Il Lee, The Brush and The Sword : Kasa, Cross-Cultural Communication Press, 2009.
6. 자료
6.1. 원문자료 출처
그의 작품들은 그의 문집 《노계집(蘆溪集)》에 실려 전한다. 《노계집(蘆溪集)》은 1690년 이덕형의 증손 이윤문(李允文, 1646~1717)이 선조와 관련된 작품만 목판으로 간행한 이후 모두 3차에 걸쳐 간행되었다. 1831년 박인로의 후손 박천주(朴天柱)와 박희주(朴希柱)가 목판본으로 간행한 후, 1904년, 1959년에 훼손되거나 빠진 부분을 보완하여 다시 간행되었다.
7. 참고문헌 및 외부 링크
7.1. 참고문헌
김문기, 《국역 노계집》, 역락, 1999.
우응순, 〈박인로의 ‘안빈낙도’ 의식과 자연〉, 《조선 중기 시가와 자연》, 태학사, 2002.
정소연, 〈박인로의 시조와 한시 비교 연구〉, 《우리어문연구》 50, 우리어문학회, 2014.
최현재, 《朴仁老 詩歌의 現實的 基盤과 文學的 指向 硏究》,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4.
최현재, 《조선 전기 사대부 가사》, 문학동네, 2012.
7.2. 외부링크
한국가사문학관 (http://www.gasa.go.kr/)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선상탄〉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575043&cid=46642&categoryId=46642)
이응백 외 2, 국어국문학자료사전, 〈조홍시가〉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693774&cid=60533&categoryId=60533)
국립중앙박물관 E-뮤지엄, 〈노계선생문집〉
http://emuseum.go.kr/detail?relicId=PS0100100101600413000000
Pak Inro (朴仁老, 1561-1642)
1. Introduction
Pak Inro was a military official of mid-Joseon dynasty and a representative gasa (歌辭 literally “music words” to describe all vernacular songs) writer who created the Nuhangsa (陋巷詞 Song of a Humble Life) and Seonsangtan (船上嘆 Lament on the Waters) through the reign of Joseon dynasty. In particular, his gasa Nuhangsa is noted for its realism by describing specific experiences through the use of vernacular. His gasa are considered important works of poetry in the mid-Joseon period because they serve as a bridge between the early Joseon period which enshrined Confucian literary values of high officials and the late Joseon period which dominated by the realistic sentiments of common people.
2. Life
Pak Inro was born in Yeongcheon (永川), Gyeongsang province in 1561. His pen name is widely known as Nogye (盧溪). He was born as a son of a destitute hereditary elite (兩班 yangban) family. However, considering that his anthology includes the traditional Chinese poem (漢詩 Hansi) Daeseungeum (戴勝吟 Song of the Hoopoe) which he created at the age of 13, one can presume that Pak Inro received a minimum education as yangban. At 32 years old (1592) when his hometown was invaded during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he served as a minor official under the Commander-in-Chief (節度使 Jeoldosa) Seong Yunmun (成允文, unknown birth and death date). During the period, he wrote the gasa Taepyeongsa (太平詞 Song of Peace) by the order of Seong and it was considered as his first formal creative work. Pak passed the military service examination and started his service at the age of 39 (1599) and later served as a Gatekeeper (守門將 sumunjang) and a royal messenger (宣傳官 seonjeongwan). In 1605, he served as the captain of warship (統舟師 tongjusa) in Tongnae (東萊), Gyeongsang province. At that time, he wrote the gasa Seonsangtan on the boat to Tongnae. At the end of his position as the captain of warship, his career as an official ended. Later, he abandoned his life as a military official and follows the traces of Confucian scholars, spending the rest of his life as a scholar. He died in 1642 at the age of 82. His posthumous anthology Nogyejip (蘆溪集 Collection of Nogye Works) includes 109 Hansi, 67 sijo, and 9 gasa. [1]
Pak’s social relationship is closely related to his literary activities. At the age of 51 (1611), he visited the mid-Joseon distinguished retainer, Yi Deokhyeong (李德馨, 1561-1613) and created the gasa such as Nuhangsa and Sajegok (莎堤曲 Song of Sedge Bank) and sijo Johongsiga (早紅詩歌 Song of Early Ripe Red Persimmons). Later, Yi Deokhyeong became a strong supporter of Pak, sometimes making a recommendation to the royal court. Moreover, studying the Confucian classics, he created his works while seeking the homes of renowned Confucian scholars such as Yi Hwang (李滉, 1501-1570), Jeong Gu (鄭逑, 1543-1620), Yi Eonjeok (李彦迪, 1491-1553), Jang Hyeongwang (張顯光, 1554-1637). Most of these figures were scholarly and politically renowned Confucian scholars at that time. The social interaction between the renowned scholars and Pak was formed by spending time together with them because he was relatively below in terms of career and scholarship. Pak was praised as a good singer (善歌者 seongaja) by them. Through the social interaction, he could create many masterpieces in Korean by the order of the distinguished scholars. [2]
3. Works
Pak Inro contributed greatly to the poetry literature in Korea by leaving a total of 109 Hansi, 67 sijo, and 9 gasa. As mentioned above, he created many sijo and gasa in Korean, while interacting with highly reputed Confucian scholars. And most of them were strongly reflect the narrator’s determination to adamantly follow the Confucian ideology. Some of his works convey the will to follow the Confucian principles as a Confucian scholar and to practice anbinnakdo (安貧樂島 finding contentment and pleasure from living honestly in poverty).
3.1 Gasa
Pak Inro left a total of nine pieces of gasa. Among them, seven works were created in the course of social interaction with the highly reputed Confucian scholars. Nuhangsa and Sajegok were written during his interaction with Yi Deokhyeong; Ipam byeolgok (立巖別曲 Song of Ipam) with Jang Hyeongwang; Soyujeongga (小有亭歌 Song of Soyu Pavilion) with Jeong Gu; Taepyeongsa written by order of Seong Yunmun; Yeongnamga (嶺南歌 Song of Yeongnam County) created in honor of Yi Geunwon who ruled Yeongnam region based on Confucian ethics; Dongnakdang (獨樂堂 Hall of Solitary Bliss) created to admire the thoughts of Yi Eonjeok. Moreover, there are Nogyega to convey the beauty of the haven and his life and Seonsangtan to reflect the patriotism as a military official.
Nuhangsa was created as Pak’s answer in response to Yi Deokhyeong’s question on Pak’s impoverished life in a mountain village after participating in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and returning to his hometown. The poem conveys the joy of anbinnakdo: to not resent the poverty but enjoy the life of being friends with nature. Seonsangtan is a song to express his sorrowful indignation towards the enemies [Japanese] and the desire for peace after coming to Tongnae county, where the threat of war hung over after the end of the Japanese war in 1592. The work shows the combination of hostility towards the enemy, concern over the king, and longing for peace and prosperity. This work, along with his other gasa Taepyeongsa, is considered to be a representative literary work of war experience.
3.2 Sijo
Among his 67 sijo (poems), the gyohun sijo (敎訓時調 Sijo of Lesson) emphasize the practice of Confucius ethics such as loyalty and filial piety account for the largest part of his works. [3] The most widely known works of his sijo include 25 verses of Oryunga (五倫歌 Song of the Five Relationships) and 4 verses of Johongsiga. The Johongsiga is a yeonsijo (聯詩調 long narrative sijo which are made up of multiple pyeongsijo) created by Pak Inro in 1601. When Yi Deokhyeong arrived in Yeongcheon County, Gyeongsang Province as a supreme commander (都體察使 Dochechalsa), he sent red persimmon to Pak as a gift. In response, Pak created the poem on the spot. The poem has a theme of filial piety and reminds a Chinese Idiom of Lu Ji (陸績, 188-219)’s huai ju (懷橘) [4] during the Three Kingdoms of China. [5] This work is published in the third chapter of Nogyejip and is also published in anthologies such as Cheongguyeongeon (靑丘永言 Songs of Green Hills) and Haedonggayo (海東歌謠 Songs of Ancient Korea).
(Translation into Contemporary Korean)
쟁반에 놓인 조홍감이 곱게도 보이는구나
유자가 아니라도 품음직도 하다마는
품어가도 반길 사람이 없어 그것을 서러워하노라
(Original Text)
盤中(반중) 早紅(조홍)감이 고아도 보이ᄂᆞ다
柚子(유자) 안이라도 품엄 즉도 ᄒᆞ다마ᄂᆞᆫ
품어 가 반기리 업슬ᄉᆡ 글노 설워 ᄒᆞᄂᆞ이다
4. Style and Legacy
Pak Inro was a pioneering figure as a local scholar and literati (在地士族 Jaejisajok) writer who emerged as a new class in the mid-Joseon poetry literature after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He is noted for being distinguished from the contemporary writers such as Songgang (松江) Jeong Cheol (鄭澈, 1536-1593) and Gosan (孤山) Yun Seondo (尹善道, 1587-1671) who were traditional high officials. The traces of anbinnakdo, which appears frequently in Pak Inro’s works, has been understood as the only choice of Confucian life as a local scholar and literati that could not participate in central service. [6] This is a different point compared to the high officials of early Joseon dynasty who chose nature as a place of permanent harmony amid the conflicts with political reality. On the other hand, Pak Inro’s representative work Nuhangsa is a highly regarded because it presented a new direction of gasa in the late Joseon dynasty through a realistic narration of impoverished reality.
5. Others
5.1 Works in Translation
Lee, Peter, H., A History of Korean Literature, New York: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3.
O’Rourke, Kevin, The Book of Korean Poetry: Songs of Shilla and Koryo, Iowa City: University of Iowa Press, 2006
Lee, Sung-Il, The Brush and The Sword: Kasa, Merrick, N.Y.: Cross-Cultural Communication Press, 2009.
6. Resources
6.1. Source of Original Text
His works are carried with a title, Nogyejip (蘆溪集 Collection of Nogye Works). It was published by Yi Deokhyeong’s great-grandson Yi Yunmun (李允文, 1646-1717) using woodblock printing method in 1690. After the publication, his collection was printed three times more. Pak Inro’s descendants - Pak Cheonju (朴天柱) and Pak Huiju (朴希柱) published it as a woodblock print in 1831. It was reprinted in 1904 and 1959 again with supplements of damaged or missing parts.
7. References and External Links
7.1 References
Kim, Mungi, Gugyeok Nogyejip (Korean Translation of Nogyejip), Youngnak, 1999.
Woo, Eungsun, “Pak Inro ui Anbinnakdo Uisik gwa Jayeon (Consciousness of Pak Inro’s Anbinnakdo and Nature),” Joseon Junggi Siga wa Jayeon (Siga and Nature during mid-Joseon Period), Taehaksa, 2002.
Jeong, Soyeong, “Pak Inro ui Sijo wa Hansi Bigyo Yeongu (A Comparative Study between Pak Inro’s Sijo and Hansi),” Uri Eomun Yeongu 50 (A Study of Korean Language), The Society of Korean Language and Literature, 2014.
Choe, Hyeonjae, Pak Inro Siga ui Hyeonsiljeok Giban gwa Munhakjeok Jihyang Yeongu (A Study on the Realistic Foundation and Literary Direction of Pak Inro’s Siga), Ph. D Thesis of Seoul National University, 2004
Choe, Hyeonjae, Joseon Jeongi Sadaebu Gasa (The literati’s Gasa during Early Joseon Period), Munhak Dongne, 2012.
7.2 External Links
[Hanguk Gasa Munhak gwan]
http://www.gasa.go.kr/
[Encyclopedia of Korean Culture] Seonsangtan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575043&cid=46642&categoryId=46642
Lee, Eungbaek and 2 others, Gugeo Gukmunhak Jaryo Sajeon (A Dictionary of Korean Literature), Joheung Siga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693774&cid=60533&categoryId=60533
[National Museum of Korea E-Museum] Nogye Seongsaeng Munjip
http://emuseum.go.kr/detail?relicId=PS0100100101600413000000
8. Notes
[1] Regarding the number of extant works, refer Kim Mungi (1999).
[2] For more information regarding this issue, refer Choe Hyeonjae (2004), 24-39.
[3] Jeong, Soyeon, (A Comparative Study between Pak Inro’s Sijo and Hansi), (A Study of Korean Language) 50, The Society of Korean Language and Literature, 2014.
[4] “Lu Ji (陸績, Kor. Yukjeok, 188-219) conceals the mandarin oranges in his chest” alludes to profound filial piety. Lu Ji was the staff of Emperor of Eastern Wu, Sun Quan (孫權, r.229-252). When he was six years old, Lu Ji met Yuan Shu (袁述) in Pearl River. Yuan Shu gave Lu Ji the mandarin oranges to eat. Lu barely ate them, and while Yuan Shu was away for a while, he quickly picked up mandarin oranges and hid them in his arms. When it was time for his return, Lu Ji made farewell to Yuan Shu; however, in doing so, he dropped the mandarin oranges which he hid. Yuan Shu asked Lu Ji, “you came as a guest and why did you hide them in your arms?” Lu Ji replied, “I want to bring them home for my mother.” It is said that Yuan Shu was very impressed with the filial piety of young Lu Ji. This ancient story is one of the twenty four of filial piety in Er shi si xiao (二十四孝 the Twenty-four Filial Exemplars) that Guo Jujing (郭居敬) wrote about 24 filial sons of China. Derived from this story, “Lu Ji’s mandarin orange” is used as a metaphor for the profound filial piety towards the parents.
[Doosan Encyclopedia] Yukjeokhoegyul (陸績懷橘)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236122&cid=40942&categoryId=32972
[5] Lee, Eungbaek and 2 others, Gugeo Gukmunhak Jaryo Sajeon (A Dictionary of Korean Literature), Joheungsiga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693774&cid=60533&categoryId=60533
[6] Woo, Eungsun, (Consciousness of Pak Inro’s Anbinnakdo and Nature), (Siga and Nature during mid-Joseon Period), Taehaksa, 2002.
[7] Sin, Gyeongsuk and others, Gosijo Munheon Haeje (Bibliographical Annotation on Old sijo), Institute of Korean Studies, Korean University Research, 2012, 486-4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