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현(李齊賢)
작성: 김세호(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분류: 일반주제
◆기본 정보
이제현(李齊賢, 1287∼1367)의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중사(仲思), 호는 익재(益齋)‧역옹(櫟翁)이다. 검교시중(檢校侍中)을 지낸 이진(李瑱)의 아들로 태어났다. 충선왕(忠宣王)의 만권당(萬卷堂)에서 머물며 중국의 문인학자들과 교유했고 『역옹패설(櫟翁稗說)』을 저술하였다.
◆작가 생애
이제현은 어려서부터 남달리 성숙했고 다른 아이들과 구별되는 비범한 재능을 드러냈다. 1301년(충렬왕 27) 성균시(成均試)에 1등으로 합격한 뒤 이어 과거에 급제해 조정에 출사했다. 이때 이제현은 당시 대학자이자 권세가였던 권부(權溥)의 문하에서 수학하며 권부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게 된다. 이후 조정에 출사(出仕)하여 여러 관직을 역임하던 중 1314년(충숙왕 1년)에 충선왕(忠宣王)의 부름을 받아 중국 원(元)나라의 수도 연경(燕京)으로 가게 되었다.
충선왕은 재임 시절 개혁을 추구했으나 정책이 실패하자 왕위를 아들 충숙왕(忠肅王)에게 물려주었다. 이후 연경에 머물면서 만권당(萬卷堂)이라는 이름의 서재(書齋)를 짓고 원나라의 명사(名士)들과 함께 경전(經典)과 고금(古今)의 역사(歷史) 토론하며 연구하였다. 이곳에는 원나라의 유명한 문인학자들도 자주 드나들었는데 충선왕은 그들을 상대할 고려의 인물로 이제현에 주목하여 그를 서재로 불러들였다. 이제현은 원나라에 머물면서 중국의 저명한 문인학자와 교유했고, 세 번에 걸쳐 원나라를 두루 유람하며 학문과 식견을 넓혀나갔다. 이때 이제현이 지은 시문은 당시 중국 문인들에게 널리 읽혔다고 전한다.
이제현은 6년간의 원나라 생활을 마치고 귀국했다. 1321년 부친 이진이 세상을 떠나자 상을 치렀고 이후 다시 관직으로 나아가 재상의 지위에 올랐다. 그러나 조적(曺頔, ?∼1339)이 반란을 일으켜 정국이 혼란해지자 두문불출(杜門不出)한 채 저술 활동에만 전념했다. 『역옹패설(櫟翁稗說)』도 이때 저술되었다. 1348년 충목왕이 죽자 공민왕(恭愍王)을 추대하기 위해 힘썼고 1351년 공민왕이 즉위하자 정승에 임명되어 개혁정치를 위한 국정을 총괄했다. 1367년(공민왕 16) 8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문충공(文忠公)이란 시호를 받았다.
◆작품 세계
이제현은 문학적 재능을 바탕으로 많은 업적을 이룬 인물로 평가된다. 개인 문집으로 10권 4책의 『익재난고(益齋亂藁)』를 남겼고, 필기(筆記)인 『역옹패설』을 저술하였다. 서거정(徐居正)은 『동인시화(東人詩話)』에서 “그는 사(詞)에 능하여 자자구구(字字句句)가 음률에 맞았다.”라고 말했고, 중국 시인들도 짓기 힘들어했던 사를 자유자재로 창작했다며 실력을 높이 평가했다. 특히 이제현은 소악부(小樂府) 11수를 남겼고 당시에 널리 불리던 고려(高麗) 속요(俗謠)를 칠언절구(七言絶句)의 한시로 번역해 잃어버린 우리 가요(歌謠)의 존재를 일부나마 기록으로 남겨 세상에 알렸다.
『역옹패설』은 4권 1책으로 1342년(충혜왕 3)에 지은 저작이다. 역사적 사실의 기술과 함께 평론을 수록했다. ‘낙옹비설’이라 읽는 것이 저자의 뜻을 좇는 것이라고 하는 학자들도 있으나, 현재는 ‘역옹패설’로 읽는 것이 일반적이다. 『역옹패설』은 고려의 정치 현실에 대한 비판적 인식에서 출발한다. 그는 고려를 존속시키기 위해 국내 정치와 경제에서 근본적인 개혁을 단행하여 국가재정을 확립하고 도탄에 빠진 민생(民生)을 구하는 것을 시급한 일로 여겼다. 원나라에게 치욕을 당한 것을 반성하는 측면에서 부당한 사대주의에 저항하는 모습을 드러내기도 하고, 무신정권(武臣政權)의 전횡을 폭로하고, 그 폐단을 고발한 시각 등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문학사적 위상과 의의
이제현은 당대 고려를 대표하는 정치가이자 학자이다. 문하시중(門下侍中)이라는 고려 최고의 관직에 올랐고 해박한 식견과 여러 시문(詩文)은 당시에 이미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고려는 무신정권으로 인한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었고 원나라의 정치적 간섭을 받던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었다. 이제현은 이러한 현실 속에 국가의 존립과 사회모순을 바로잡고자 했고 고려와 원나라를 오가며 고려의 주권을 보전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던 인물이었다.
이제현은 문학과 학문에서도 큰 업적을 이룬 것으로 평가된다. 이색(李穡)은 이제현이 도덕과 문장에서 최고의 경지에 올랐다고 했고 특히 문장은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인 한유(韓愈)에 버금가는 인물로 평가했다. 무엇보다 이제현은 고문(古文)을 창도(唱導)하여 사대부 계급이 자기 개성의 발견과 사대부다운 가치관과 인간형을 정립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고려 말 조선 초기의 역사 전환기에 주도적 역할을 함으로써 본격적인 사대부 문학을 열 수 있도록 예비(豫備)하였다.
또한 이제현은 성리학의 수용과 발전에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이는 그가 만권당에서 교유한 중국의 문인학자들이 모두 성리학에 깊은 조예를 가진 사람들이었던 데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제현은 이러한 중국 학자들과 직접 만나 성리학을 한층 깊이 이해하고 이를 국내에 전파함으로써 성리학 발전의 토대를 만들어 주었다.
◆자료
『익재집(益齋集)』: 이제현의 시문집으로 『익재난고(益齋亂藁)』 10권과 『역옹패설』 4권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고려시대에 간행된 초간본은 전하지 않고 조선 시대에 여러 차례 중간된 판본으로 남아 전한다.
『역옹패설』: 이재현이 1342년 벼슬에서 은퇴한 뒤 자기 집에 거처하며 저술한 저작이다. 당시에는 책으로 간행되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전하는 것이 없고 1814년 경주에 거주하던 후손들에 의해 간행된 『익재난고(益齋亂藁)』에 수록된 내용이 전한다.
이제현 초상: 고려 말 원(元)나라 화가 진감여(陳鑑如)가 그린 이제현(李齊賢)의 초상화가 전한다. 안향상((安珦像)과 함께 현전하는 고려시대 진본 영정으로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1962년 국보 제110호로 지정되었다.
◆참고 문헌 및 사이트
임형택,「고려말(高麗末) 익재(益齋)의 고문창도(古文唱導), 『진단학보』 51호, 1981.
정구복, 「이제현의 역사의식」, 『진단학보』 51호, 1981.
http://db.itkc.or.kr/dir/item?itemId=BT#/dir/node?dataId=ITKC_BT_0011B [한국고전종합DB] 『익재집』 고전번역서
http://db.itkc.or.kr/dir/item?grpId=hj#dir/node?grpId=hj&itemId=BT&gubun=book&depth=3&cate1=Z&cate2=&dataGubun=서지&dataId=ITKC_BT_0011B [한국고전종합DB] 『익재집(益齋集)』 해제
http://db.itkc.or.kr/dir/item?itemId=BT#dir/node?grpId=&itemId=BT&gubun=book&depth=2&cate1=Z&cate2=&dataGubun=서지&dataId=ITKC_BT_0020A [한국고전종합DB] 이색(李穡), 『목은집(牧隱集)』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45877[한국민족문화대백과] 이제현 [李齊賢]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36630[한국민족문화대백과] 역옹패설 [櫟翁稗說]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46803[한국민족문화대백과] 이제현 초상 [李齊賢肖像]
Yi Jehyeon (李齊賢, 1287-1367)
1. Introduction
The family of Yi Jehyeon came from Gyeongju (慶州) county of Gyeongsang province. His courtesy name is Jungsa (仲思), and his pen name is the Ikjae (益齋) and Yeogong (櫟翁). He was born as a son of Yi Jin (李瑱, 1244-1321), who served as a Honorary Chancellor (檢校侍中 Geomgyo sijung). He interacted with Chinese literary scholars while he stayed in the Hall of the Ten Thousand Scrolls (萬卷堂 Mangwondang) of King Chungseon (忠宣王, r.1298-1308), and wrote Yeogongpaeseol (櫟翁稗說 Miscellaneous Words of Yeogong [Old Man Acorn]).
2. Life
Yi Jehyeon was very mature since youth and showed extraordinary talents that distinguished him from other children. In 1301, he passed the advanced scholar examination (成均試) of the National Academy (國子監) with the highest score, and entered the government office immediately after passing the civil service examination. Yi studied under Kwon Bo (權溥, 1262-1346), who was a great scholar and had great authority at this time, and married his daughter. Afterward, he served in various offices of the court. In 1314, he was ordered by King Chungseon to go to Yanjing (燕京), the capital of the Yuan Dynasty of China.
King Chungseon attempted to pursue reform during his reign, but when his policies failed, he passed on the throne to his son King Chungsuk (忠肅王, r.1313-1330). Later he stayed in Yanjing, where he built a library called Mangwondang and discussed the history of ancient and modern times as well as the scriptures with the prominent figures of the Yuan dynasty. As famous literary scholars of the Yuan dynasty frequently visited Mangwondang, King Chungseon called Yi to Mangwondang to represent the scholars of Goryeo dynasty and to debate with the scholars of the Yuan dynasty. While staying in the Great Yuan, Yi interacted with prominent Chinese literary scholars. Yi also broadened his knowledge and his insights by traveling through the entire Yuan Dynasty three times. It is told that Yi’s poems were widely read by Chinese writers during this period.
Yi Jehyeon returned home after staying in Yuan for six years. In 1321, he went into mourning for his father Yi Jin who passed away. After the mourning, he went back to serve the government and became premier under the King. However, when Jo Jeok (曺頔, ?-1339) started an uprising and the country fell to a state of disorder, he confined himself to his home and concentrated on his creative endeavors. Yi wrote the Yeogongpaeseol during this time. After King Chungmok’s death in 1348, he endeavored to crown King Kongmin as the king of the country. In 1351, when King Kongmin (恭愍王, r.1351-1374) ascended the throne, Yi was appointed as the minister and oversaw the government for reform politics. He died at the age of 81 in 1367 and was given the title of Munchunggong (文忠公).
3. Work
Yi Jehyeon is regarded as a figure who fulfilled many achievements with his literary talent. As his anthology, he wrote ten chapters in four volumes of Ikjaenango (益齋亂藁 Random Jottings of Ikjae) and the Yeogongpaeseol. Seo Geojeong (徐居正, 1420-1488) said in his a book, Donginsihwa (東人詩話 Remarks on Poetry by a Man from the East), “he [Yi] was so good at lyrics that each word and each phrase were in tune with the rhythm.” He praised Yi’s ability to freely compose lyrics when even Chinese poets struggled to do so. For example, Yi left eleven poems of the Soakbu (小樂府 A Small Collection of Folk Songs), and translated some of the widely known Goryeo folk songs of that time to a specific type of Chinese poems with seven syllables four line. His translation remains to be few of the only record the Goryeo folk songs.
Yeogongpaeseol was published in one volume (four chapters) in 1342. It included critical essays along with descriptions of historical facts. Some scholars believe that Yi would have wanted the title to be read as “Nagongbiseol” (櫟翁稗說 same Chinese characters, but different pronunciation of Yeogongpaesepl) for its purpose, but it is generally read as “Yeogongpaeseol” nowadays. Yeogongpaeseol starts with the critical recognition of Goryeo’s political reality. He thought that in order to retain the order of Goryeo, it was urgent to make fundamental reforms in domestic politics and economy leading to establishment of stable national finances, and the enhancement of the public welfare. Reflecting on the period during which Goryeo was humiliated by the Yuan dynasty, he showed his resistance to the corrupted status of Goryeo’s flunkeyism (事大主義 sadaejuui) and even revealed the tyranny of the Military Regime.
4. Style and Legacy
Yi Jehyeon was a representative politician and scholar of the Goryeo dynasty. He served as the prime minister (門下侍中 munhasijung), which was the highest official in Goryeo. Moreover, his extensive intelligence and his varied works of poetry were already recognized at that time. Though Goryeo was suffering from the aftermath of the military regime and was in a difficult situation under the political interference of the Yuan dynasty, Yi made efforts to reestablish the presence of the state and to resolve social contradictions, while he also made great efforts to preserve the sovereignty of Goryeo, traveling back and forth between Goryeo and the Yuan Dynasty.
Yi is said to have made great achievements in literature and scholarship. Yi Saek (李穡, 1328-1396) said that Yi Jehyeon was at the highest level in ethics and composition and that his writing was particularly similar to that of Han Yu (韓愈, 768-824), a member of The Eight Masters in Tang and Song Dynasty. Above all, Yi advocated ancient writings to enable the sadaebu (士大夫 the literati) to establish their character and to form their morals as a sadaebu. He played a major role during the transition between the late Goryeo and early Joseon by preparing for the new era of sadaebu’s literature.
Yi also played an important role in the acceptance and development of Confucianism as many of the Chinese literary scholars he interacted with in Mangwondang had a deep understanding of the doctrines of Chu-Tzu. Yi met with these Chinese scholars to deepen his understanding of the doctrines of Chu-Tzu and spread his knowledge in Goryeo, establishing the foundation for the Sung Confucianism to develop.
5. Resources
Ikjaejip (益齋集 Collection of Ikjae Works): Yi Jehyeon’s poem collection is composed of ten chapters of Ikjaenango and four chapters of Yeogongpaeseol. The first edition published in the Goryeo dynasty has not been passed down, but there is a surviving edition which was published several times during the Joseon Dynasty.
Yeogongpaeseol: Yeogongpaeseol was written by Yi Jehyeon who lived in his house after retiring from his position in 1342. It is believed to have been published at the time, but there is no surviving manuscript. The contents of Yeogongpaeseol were published in Ikjaenango by Yi’s descendants who lived in Gyeongju in 1814.
Portrait of Yi Jehyeon: A work of the painter Chen Jianru (陳鑑如, unknown birth and death date) in the Yuan Dynasty during the late Goryeo period. Along with a portrait of An Hyang (安珦, 1243-1306), it is in the collection of the National Museum of Korea as an authentic portrait created during the Goryeo period. It was designated as the 110th National Treasure of Korea.
6. References and External Links
6.1 References
Im, Hyeongtaek, “Goryeomal Ikjae ui Gomunchangdo (Ikjae’s Classical Singing Guide during Late Goryeo),” Jindan Hakbo (Journal of Korea) 51, 1981.
Jeong, Gubok, Yi Jehyeon ui Yeoksa Uisik (Yi Jehyeon’s Historical Consciousness), Jindan Hakbo (Journal of Korea) 51, 1981.
6.2 External Links
[Korean Classics DB] Ikjaejip Translation
http://db.itkc.or.kr/dir/item?itemId=BT#/dir/node?dataId=ITKC_BT_0011B
[Korean Classics DB] Ikjaejip Description
http://db.itkc.or.kr/dir/item?grpId=hj#dir/node?grpId=hj&itemId=BT&gubun=book&depth=3&cate1=Z&cate2=&dataGubun=서지&dataId=ITKC_BT_0011B
[Korean Classics DB] Isaek (李穡), Mokeunjip (牧隱集)
http://db.itkc.or.kr/dir/item?itemId=BT#dir/node?grpId=&itemId=BT&gubun=book&depth=2&cate1=Z&cate2=&dataGubun=서지&dataId=ITKC_BT_0020A
[Encyclopedia of Korean Culture] Yi Jehyeon (李齊賢)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45877
[Encyclopedia of Korean Culture] Yeogongpaeseol (櫟翁稗說)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36630
[Encyclopedia of Korean Culture] Portrait of Yi Jehyeon (李齊賢肖像)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468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