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i Kwang-su (1892–1950) was a Korean writer and independence and nationalist activist. His pen names were Chunwon and Goju. Yi is best known for his novel Mujeong (무정 The Heartless), sometimes described as the first Korean novel.
Life
Yi Kwang-su was born Yi Bogyeong in 1892 in Jeongju. He was orphaned at age 10 and grew up with Donghak believers. In 1904, around the time of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he moved to Seoul in order to avoid the authorities. In 1905 he went to Japan for his education. In 1909 he published his first story, written in Japanese, "Ai ka" (愛か Maybe Love), in Meiji Gakuin’s Shirogane gakuhō, his school newsletter. Upon returning to Korea in 1913, he taught at Osan School in Jeongju. He later moved back to Tokyo and became one of the leaders of the anti-colonial student movement.
In 1919 he moved to Shanghai and served in the Korean Provisional Government and became president of The Independent, a newspaper in Shanghai. Yi returned to Korea in 1921 and founded the Alliance for Self-Improvement, established on principles of enlightenment and self-help. From 1923 to 1934 Yi pursued a career in journalism working for several newspapers, including two that survive today, the Dong-a Ilbo and the Chosun Ilbo.
After the war, the Special Committee for the Investigation of Anti-nationalist Activities found Yi guilty of collaboration. In 1950 Yi was captured by the North Korean army and died in Manpo on October 25, most likely of tuberculosis.
Writing
Yi was a fiction writer and essayist. His essays originally focused on the need for national consciousness. His fiction was among the first modern fiction in Korea and he is most famous for his novel The Heartless. The Heartless was a description of the crossroads at which Korea found itself, stranded between tradition and modernity and undergoing conflict between social realities and traditional ideals. His career can be split into thirds. The first period (that of The Heartless), from 1910-19 featured a strong attack on Korea's traditional society and the belief that Korea should adopt a more modern, "Western" worldview. From the early 1920s to the 1930s, Yi transformed into a dedicated nationalist and published a controversial essay, "Minjok gaejoron" (민족 개조론 On the Remaking of National Consciousness), which advocated a moral overhaul of Korea and blamed Koreans for being defeatist. The third period, from the 1930s on, coincided with Yi's conversion to Buddhism, and his work consequently became noticeably Buddhist in tone. This was also the period in which, as noted above, Yi became a Japanese collaborator.
Yi's professional judgment could be as fickle as his politics. In one famous case he befriended then abandoned the fellow writer Kim Myeong-sun, allegedly because his own beliefs about modernism had shifted. Yi has also been considered one of the pioneers of queer literature in Korea, publishing the short story "Ai ka" (愛か Maybe Love) in 1909, at the age of seventeen.
이광수(1892~1950)는 대한민국의 소설가이며 언론인이다.
생애
이광수는 1892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났다. 호는 춘원(春園), 아명은 이보경(李寶鏡)이며, 필명으로는 장백산인(長白山人), 고주(孤舟), 외배, 경서학인(京西學人) 등을 썼다.
이광수는 1899년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하였다. 1902년 8월 콜레라로 부모를 여의고, 누이동생들과 함께 외가와 재당숙 집에서 자랐다. 1903년 동학에 입도했으며, 1905년 8월 일진회의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1906년 3월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러나 학비 곤란으로 같은 해 11월 귀국하였고, 1907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메이지학원 중학부 3학년에 편입하였다. 메이지학원 동창회보인 《백금학보(白金學報)》 제19호에 일본어로 쓴 〈사랑인가〉를 발표하며 문학 활동을 시작하였다.
1910년 《소년》지에 신체시 〈우리 영웅〉을, 《대한흥학보》 제11호에 평론 〈문학의 가치〉와 단편소설 〈무정〉을 발표하였다. 1910년 3월 메이지학원 중학을 졸업하고 귀국해 정주 오산학교의 교사가 되었다. 1914년 미국에서 발간되던 《신한민보》의 주필로 내정되었으나 제1차 세계대전 발발로 미국에 가지 못했다. 1915년 9월 일본으로 다시 건너가 와세다대학 고등예과에 편입하였다.
1917년 1월 1일부터 5월 14일까지 《매일신보》에 장편소설 《무정(無情)》을 연재하였고, 같은 해 와세다대학 철학과에 입학하였다. 1918년 폐병이 재발한 이광수는 당시 허영숙의 간호가 인연이 되어 결혼까지 하게 된다. 이 시기 이광수는 전통적인 가부장 제도를 비판하고, 자유로운 결혼생활을 등을 주장한 글을 발표해 당시 사회에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1919년 1월 일본에서 조선청년독립단에 가담해 〈2·8독립선언서〉를 작성했고, 상하이로 가서 신한청년당에 가담하였다. 1919년 7월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사료편찬위원회 주임, 8월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발행한 《독립신문》의 사장 겸 편집국장이 되었다. 1920년 4월 흥사단에 입단하였고, 1921년 3월 상하이에서 귀국한 후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었으나 불기소 처분되었다.
1922년 5월 《개벽》에 조선 민족에 대한 전면적 개조를 주장한 논설〈민족개조론(民族改造論)〉과 1924년 《동아일보》에 연재하던 논설〈민족적 경륜(民族的 經綸)〉의 내용이 사회적 논란을 일으켰다. 1926년 1월 수양동우회 발족에 참여했고, 이후 동아일보 편집국장과 조선일보사 부사장으로 일했다. 1937년 6월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안창호와 함께 투옥되었다가 병보석으로 풀려났으며, 1938년 11월 수양동우회 사건의 예심을 받던 중 전향을 선언하였다. 1939년 11월 ‘조선문인협회’ 회장의 자격으로 전선 병사 위문대, 위문문 보내기 행사를 주도하였다. 또한 〈국민문학의 의의〉(《매일신보》, 1940.2.15.)를 게재하며 황민화(皇民化)운동을 지지했고, 〈창씨(創氏)와 나〉(《매일신보》, 1940.2.20.)에서는 자신의 이름을 ‘향산광랑(香山光郞)’으로 바꾼 이유를 밝히며, 일제의 창씨개명 정책을 지지했다. 1941년 12월 조선임전보국단(朝鮮臨戰保國團) 전시생활부장으로, 영미타도(英美打倒)대강연회에서 ‘영미를 격멸하라’라는 주제로 강연을 했다. 1942년 《신시대》 4월호에 〈징병과 여성〉을 게재해 징병제 실시를 환영했으며, 11월 도쿄에서 열린 제1회 대동아문학자대회에 참가하였다. 1943년 11월 최남선 등과 함께 일본 내 한국인 유학생들의 입대를 권유하는 ‘선배 격려대’에 참여하였다.
이광수는 해방 이후인 1946년 9월부터 광동중학교에서 영어와 작문을 가르쳤다. 1949년 12월에는 일제강점기 당시 자신의 행적에 대한 경위를 밝힌 《나의 고백》을 출간하기도 하였다.
이광수는 1949년 2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에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으나 3월 병보석 되었고, 8월 불기소 처분되었다. 1950년 7월 납북되었고, 같은 해 10월 25일 사망하였다. 사망 후인 1963년 11월 《이광수 전집》이 출간되었다.
작품 세계
이광수의 작품 활동은 크게 세 시기로 구분된다.
첫 번째 시기는 1910년대로, 주로 《소년》, 《청춘》, 《학지광》 등의 잡지와 《매일신보》를 무대로 하여 작품 활동을 했던 시기이다. 그의 첫 장편이자 대표작인 《무정》(1917)을 비롯하여, 《개척자》(1918), 단편 〈무정〉(1910), 〈어린 벗에게〉(1917), 〈윤광호〉(1918) 등이 이 시기의 주요 작품들이며, 특히 장편 《무정》은 한국 소설사의 새로운 차원을 개척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러한 활동을 통해 이광수는 기존의 도덕과 윤리에 대한 강렬한 비판자로 등장하여, 근대주의적인 새로운 가치관과 세계관을 역설했는데, 그러한 주장은 철저하게 진화론적인 사고에 토대를 두고 있었다. 한편 장편 《무정》은 2005년 이광수의 손녀인 이성희(앤 리, 번역가이며 한국학 전공자)에 의해 미국에서 번역 출간되었다.
두 번째 시기는 그가 상해에서 귀국하여 문필 활동을 재개한 1920년대 초반부터 1930년대 초반에 이르는 시기이다. 이 시기에 이광수의 글은 현저히 윤리 중심주의적 경향을 띠게 된다. 상해 망명 시절 도산 안창호와의 만남을 통해 전폭적으로 받아들인 준비론도 이러한 경향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장편소설 《재생》(1925), 《마의태자》(1927), 《단종애사》(1928), 《흙》(1933) 등이 이 시기의 주요 저작이다.
세 번째 시기는 1930년대 중반 이후로, 이때부터 이광수의 작품들은 불교적 경향을 강하게 보여준다. 작가의 불교관은 주로 인과응보를 강조하는 대승적 경향의 것으로, 특히 장편 《세조대왕》(1940)이 그러한 사고를 반영하고 있는 대표적인 예에 해당되며, 단편 일인칭 고백체로 씌어진 〈육장기〉(1939)는 불교에 귀의한 작가의 심정을 진솔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 시기의 주요 작품으로는 장편 《이차돈의 사》(1935), 《사랑》(1938), 《원효대사》(1942), 단편 〈난제오〉(1939), 〈무명〉(1939) 등이 있다.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전까지 작가는 《태양신문》에 장편 《서울》(미완)을 연재했고, 1950년 3월에는 유작인 《운명》을 집필했으며, 5월에는 《사랑의 동명왕》이 한성도서에서 간행되었다.
주요 작품
1) 선집 및 전집
《춘원선집》, 광영사, 1959
《춘원전집》, 삼중당, 1963
《이광수전집》(전 20권), 태학사, 2022.
2) 소설
〈소년의 비애〉, 《청춘》8호, 1917.6.
〈개척자〉, 《매일신보》, 1917.11.10.~1918.3.15
〈무명〉, 《문장》창간호, 1939.2.
3) 장편소설
《무정》, 광익서관, 1918.
《일설 춘향전》, 한성도서주식회사, 1925.
《재생》, 회동서관, 1926.
《혁명가의 아내》, 삼천리사, 1930.
《마의태자》, 박문서관, 1928.
《유정》, 조선일보 1933.10.1.~12.31.
《흙》, 한성도서주식회사, 1935.
《단종애사》, 박문서관, 1935.
《애욕의 피안》, 조선일보 1936.5.1.~12.21.
《사랑》, 박문서관, 1938.
《세조대왕》, 박문서관, 1940.
《꿈》, 면학서관, 1947.
《나》, 생활사, 1947.
《원효대사》, 경진사, 1948.
《사랑의 동명왕》, 한성도서, 1950.
4) 시집
《춘원시가집 (春園詩歌集)》, 박문서관, 1940.
5) 기행문
《금강산유기(金剛山遊記)》, 시문사, 19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