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희(金正喜)
◆기본 정보
김정희(金正喜, 1786~1856)의 자는 원춘(元春), 호는 추사(秋史)·완당(阮堂)·예당(禮堂)·시암(詩庵)·과노(果老)·농장인(農丈人)·천축고선생(天竺古先生) 등이며, 본관은 경주이다. 청나라의 학술과 문예에 정통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시(詩)․서(書)․화(畵)는 물론, 금석학(金石學), 경학(經學), 고증학(考證學)에 이르기까지 독보적인 경지를 구축했다. 그는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실학적 방향을 정립한 19세기 조선의 학술과 문예를 주도하였다.
◆작가 생애
추사 김정희는 19세기 조선의 학술계와 문화계를 대표하는 학자이자 문인이다. 그는 경주 김씨 문중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병조판서 김노경(金魯敬)이며 어머니는 기계 유씨(杞溪兪氏)였다. 김정희는 어려서부터 총명하였으며 16세가 되던 해부터 북학파 일원인 박제가(朴齊家)와 사제(師弟)의 인연을 맺었다. 김정희는 스승 박제가로부터 북경의 학술과 문예의 흐름을 알았다. 24세 때, 부친 김노경을 따라 자제군관(子弟軍官)의 자격으로 연행(燕行)에 참여하였다. 이때 청대 학술을 주도하던 옹방강(翁方綱)과 완원(阮元)을 만나 학문적 감화와 영향을 받았다. 1819년 문과에 급제한 이후,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병조참판(兵曹參判), 대사성(大司成) 등을 역임하였다.
그는 조인영(趙寅永)과 같이 비문을 조사하여 진흥왕순수비임을 밝히는 등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실학적 학풍을 열어 후배에 큰 영향을 주었다. 40대 후반에 윤상도(尹尙度) 사건에 연루되어 9년간 제주도로 유배되고, 풀려난 이후 권돈인(權敦仁, 1783∼1859)의 사건에 연루되어 다시 함경도 북청에 2년간 유배되었다. 이후 그는 과천(果川)에 은거하면서 학술과 문예에 몰두하다가 1856년에 세상을 떠났다.
◆작품 세계
김정희는 저술가로 명망을 얻고 싶지 않아 원고를 두 번이나 불태웠다. 이로 인해 제자인 남병길(南秉吉) 등이 스승의 남은 원고를 수습한 후 1876년 「覃揅齋詩藁」 7권 2책을 간행하였다. 그의 작품이 수록된 것으로는『완당척독(阮堂尺牘)』(2권 2책, 1867년)․『담연재시고(覃揅齋詩藁)』(7권 2책, 1867년)·『완당선생집(阮堂先生集)』(5권 5책, 1868년)이 있다. 이 외에 110권 5책의 『완당선생전집(阮堂先生全集)』이 있는데 이는 후손 김익환(金翊煥)이 기존의 저술을 최종적으로 보충하여 1934년에 간행한 것이다.
시서화 방면에 두루 뛰어났던 그의 작품 세계를 조명하기 위해 청나라에서 맺은 인적 네트워크를 살펴보아야 한다. 북경에서 청대 학자들과의 교유가 그의 학술과 문예에 큰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①저작 배경
김정희는 24세 때 동지부사(冬至副使)로 연행하는 아버지를 수행하였다. 두 달 동안 북경에 머물면서 완원(阮元, 1765~1848)과 옹방강(翁方綱, 1733~1818) 등 당시 청나라의 최고의 금석학자이자 고증학자를 만났다. 이 외에도 주학년(朱鶴年), 이정원(李鼎元), 조강(曹江), 서송(徐松), 옹수배(翁樹培), 옹수곤(翁樹崑), 사학숭(謝學崇), 이임송(李林松) 등 청나라 학자들을 만나 교유하였다. 당시 북경 학계는 고증학의 수준이 최고조에 달하고 있던 시기였다. 김정희는 옹방강, 완원과 같은 당대 최고의 석학과 교류하면서 고증학의 최고 수준을 공부하였다. 옹방강은 추사의 비범함에 놀라 “경술(經術)과 문장(文章)이 해동(海東)에서 제일(第一)”이라 찬탄했고, 김정희는 완원과의 교류를 통해 완당(阮堂)이라는 호를 지었다.
특히 김정희가 북경에서 완원을 만날 수 있던 것은 행운이었다. 완원은 조선과 청에서 학술적 성과를 높이 평가받는 인물이기도 했다. 완원은 김정희의 스승이었던 박제가와도 인연이 있었다. 46세이던 완원은 김정희의 박식함과 총명함에 감탄했다. 이를 계기로 김정희는 귀국 후에도 완원과 서신과 서적 등을 주고받으며 학문적 교유를 이어갔다. 특히 완원이 김정희에게 보낸 서적 중 245권이라는 방대한 분량의 『십삼경주소교감기(十三經注疏校監記)』가 있는데, 이를 보면 이 두 사람이 교류한 깊이를 알 수 있다. 김정희가 완원을 스승으로 모신다는 의미로 자신의 호를 ‘완당(阮堂)’이라 짓고, 연행 후 추사(秋史)라는 호를 대신해서 완당을 더 즐겨 사용하였다.
김정희의 저작에서 옹방강의 영향 또한 지대했다. 옹방강은 당대 청나라 최고의 금석학자이자 서예가이며, 경학의 대가이자 시서화도 잘 했던 학계의 원로였다. 그는 『사고전서(四庫全書)』 편찬에 참여하였고 국자감(國子監)에서 벼슬을 지낸 바 있었다. 옹방강은 김정희가 북경에서 만날 당시 78세의 고령으로 은퇴 후 ‘석묵서루(石墨書樓)’라는 서실(書室)에서 경전을 연구하며 지내고 있었다. 김정희는 1810년 정월에 옹방강의 서실로 찾아가 필담을 나누었다.
옹방강은 청대의 학술이 한대(漢代)의 경학에 치중하는 것과 달리 송대(宋代) 경학에도 비중을 두어 한송(漢宋) 절충을 주장하였기 때문에 송대 철학에 박식한 김정희의 학문을 높이 평가하였다. 옹방강은 ‘석묵서루’에서 김정희에게 소동파의 『천제오운첩(天際烏雲帖)』 진본을 보여주었고, 많은 서책과 글씨, 탁본(拓本) 등을 선물로 주었다. 김정희는 귀국 후에도 서신을 통해 학술적 문제를 끊임없이 주고받았다.
이처럼 김정희는 연행에서 청대 학예를 주도하던 두 인물과 만난 이후, 자신의 학술과 예술에서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다.
②대표 저작
김정희는 저술가로서의 명망을 원치 않아, 자신의 원고를 두 번이나 불태우기도 했다. 그의 문하에서 공부하던 남병길(南秉吉, 1820∼1869) 등은 1867년 겨울, 그의 시를 편찬하여 7권 2책의 「담연재시고(覃揅齋詩藁)」를 간행하였다. 1년 뒤인 1868년에는 그의 척독(尺牘: 편지글이나 짧은 글)을 따로 편집해 2권 2책의 『완당척독(阮堂尺牘)』을 간행했다. 결과적으로 김정희의 문집은 모두 네 차례에 걸쳐 간행되었다. 『완당척독(阮堂尺牘)』(2권 2책, 1867년)·『담연재시고(覃揅齋詩藁)』(7권 2책, 1867년)·『완당선생집』(5권 5책, 1868년)이 있으며, 후손 김익환(金翼煥, 1898∼1978)이 기존 문집을 보충하여 10권 5책의『완당선생전집』(10권 5책, 1934년)을 간행했다. 이 책은 현재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 국립중앙도서관, 성균관대학교 존경각(尊經閣) 등에 소장되어 있다. 각 문집의 구성과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완당척독』: 2권 2책이며 상책과 하책으로 이루어져 있다. 권두(卷頭)에 의산(義山) 남병길(南秉吉)의 서문이 있다. 상책에는 8편의 편지가 실려 있는데, 홍선대원군(興宣大院君), 권돈인(權敦仁), 남병철(南秉哲), 김병학(金炳學), 김정희의 동생인 김명희(金命喜), 조원호(趙寃鎬) 등에게 보낸 편지이다. 하책에는 12편의 편지가 실려 있다. 심희순(沈熙淳), 신관호(申觀浩), 장인식(張寅植), 이상적(李尙迪), 홍현보(洪顯普), 김석준(金奭準), 오경석(吳慶錫), 오규일(吳圭一)과, 백파(白波)와 초의(草衣) 등 스님에게 보낸 편지다. 그 외에 권말에는 독외여언(牘外餘言)과 가야산해인사중건상량문(伽倻山海印寺重建上樑文)이 실려 있다.
•『담연재시고』: 7권 2책이며 상책과 하책으로 이루어져 있다. 권두에는 신석희의 서문과 남병길의 제사(題辭)가 실려 있다. 상·하책 모두 김정희의 시를 오언(五言), 칠언(七言) 및 고시(古詩), 율시(律詩), 절구(絶句)로 분류해 수록했다.
•『완당집』: 5권 5책이다. 권두에 남병길의 지(識)와 민규호(閔奎鎬, 1836∼1878)가 지은 완당김공소전(阮堂金公小傳)이 실려 있다. 권1에는 소(疏) 5편, 서(書) 10편, 문답(問答) 37편이 실려 있고, 권2에는 서(序) 2편, 기(記) 3편, 제문 4편, 상량문 1편, 고(考) 6편, 변(辨) 7편, 설(說) 6편, 논(論) 1편, 명(銘) 등 기타 5편, 제후(諸後) 12편이 실려 있고, 권3에는 척독(尺牘) 72편이 실려 있다. 권4에는 별록이 권5에는 시가 실려 있다.
•『완당선생전집』은 10권 5책으로 권두에 김영한(金寗漢, 1878∼1950), 정인보(鄭寅普, 1893∼1950)의 서(序)와 신석희(申錫禧, 1808∼1873), 남병길의 서, 그리고 민규호가 쓴 소전(小傳)이 있다. 권1∼5에 고(攷) 5편, 설 6편, 변 3편, 소 5편, 서독(書牘) 108편, 권6∼8에 서(序) 2편, 기 3편, 제발(題跋) 7편, 전(箋) 1편, 명 1편, 송 1편, 잠 1편, 상량문 1편, 제문 4편, 묘표 2편, 잡저 17편, 잡지(雜識) 1편, 권9·10에 시 240수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 가운데「진흥이비고(眞興二碑攷)」와 같은 작품은 우리나라 금석학 연구에 있어 가장 돋보이는 수작이며, 「실사구시설(實事求是說)」은 실학의 사상적 지향과 함께 하나의 새로운 길을 보여주는 글이다.
이 외에도 김정희는 수준 높은 한글 편지를 많이 남겼다. 현재까지 발굴된 그의 친필 한글 편지는 약 40여 통에 이른다. 대부분 제주도 유배 시절 부인과 며느리에게 쓴 것이다. 이는 국문학적 가치를 고려했을 때 한문 편지보다 훨씬 뛰어나다고 평가받는다.
◆ 문학사적 위상과 의의
김정희는 19세기를 상징하는 대표적 지식인으로 실사구시의 학풍을 제기하여 금석학 연구에 고증학을 접목하여 실학의 새로운 방향을 열어 이후에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김정희는 실학자이기도 하지만, 학문이나 예술의 한 영역을 뛰어넘어 조선 후기 문화 전반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는 19세기 조선의 문화코드를 상징하는 핵심적인 인물이다. ‘추사체(秋史體)’와 ‘세한도(歲寒圖)’는 조선 후기 문화에서 ‘완당 바람’을 불러일으켜 당대 학예(學藝)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와 함께 그는 청대 학술을 누구보다 정확하게 장악하고 이를 섭렵한 대가로, 이를 통해 조선의 학계와 예술계에 새로운 이론과 감각을 전파했다.
그동안 김정희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찬사 일색만은 아니었다. 청대 학술과 금석학을 수용하며 이룬 진흥왕순수비의 고증은 동아시아 최고 수준임을 인정받았다. 금석학을 통한 그의 고증학적 학문 방법은 실사구시를 통해 실학의 새로운 방향을 개척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정희는 청나라 문예를 조선에 확산시켜 영․정조 시대에 전성기를 맞이했던 조선 고유의 진경문화(眞景文化)를 퇴색시켰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문학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청대 성령설(性靈說)을 수용한 김정희의 시론은 새로운 경지를 제시한 점에서 호평을 받았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청나라 금석고증학에 치중한 나머지 현실을 외면한 고답적 시론에 불과하다고 비판받기도 한 것이다.
하지만 그가 학자적 관점에서 문예를 다룬 동아시아 최고의 학예가(學藝家)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시인이나 서화가, 여기에 학자의 면모가 김정희 한 사람에게 오롯이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특히 김정희의 고증학에 기반을 둔 문예의 성취는 실학과 연결되어 그 위상과 가치를 부여할 수 있다.
◆자료
https://youtu.be/nUqYZzNyH4o EBS 기획 시리즈 – 한국인물사 연속특강 (추사 김정희)
https://youtu.be/87N-WBazUvs KBS 역사저널 그날 – 영상한국사 306 (추사 김정희의 「완당 세한도」 - 삶, 그 쓸쓸함에 대하여)
◆참고 문헌 및 사이트
정민 저, 『18세기 한중 지식인의 문예공화국』, 문학동네, 2014.
유홍준 저, 『추사 김정희』, 창비, 2018.
박철상 저, 『세한도』, 문학동네, 2010.
박철상, 『추사 김정희 금석학 연구』, 계명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2011.
후지츠카 지카시〔藤塚隣〕 저, 『추사 김정희 연구』, 과천문화원, 2008.
이철희, 『추사 김정희 시론 연구;중국 시론의 수용과 조정을 중심으로』, 성균관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2001.
전가람, 『추사 김정희 시론 연구;청대 건가 시기 시론의 수용과 변용을 중심으로』, 전북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2018.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10428,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김정희[金正喜]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55015,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진흥왕순수비[진흥왕순수비]
http://db.itkc.or.kr 한국고전종합DB, 『완당집』 해제
Kim Jeonghui (金正喜, 1786-1856)
1. Introduction
Kim Jeonghui had the courtesy name Wonchun (元春), the pen names Chusa (秋史), Wandang (阮堂), Yedang (禮堂), Siam (詩庵), Gwano (果老), Nongjangin (農丈人), and Cheonchukgo seonsaeng (天竺古先生), and his family origin was Gyeongju county. He was well-versed in Qing dynasty scholarship and literature and, with this in the background, he constructed an unrivaled stage of, of course si (詩 poetry), seo (書 calligraphy), hwa (畵 drawing), as well as geumseokhak (金石學 epigraphy), gyeonghak (經學 study of Confucian Classics), and even Kaozheng xue (考證學gojeunghak in Korean; empirical school of scholarship). He led 19th century Joseon scholarship and literature, which established the direction of Silhak (實學 practical learning) in silsa gusi (實事求是 seeking the truth from real facts).
2. Life
Chusa Kim Jeonghui was a scholar and writer representative of 19th century Joseon scholarly and cultural spheres. He was born to a Gyeongju Kim family. His father was a Minister of War (兵曹判書 senior-2 rank) Kim Nogyeng (金魯敬, 1766-1837) and his mother’s maiden name was Gigye Yu-ssi (杞溪兪氏). Kim Jeonghui was bright from an early age, and in the year he turned 16, he established a student-teacher relationship with Pak Jega (朴齊家, 1750-1815) who was a member of the Northern School of Practical Learning (北學派 Bukhakpa). Kim Jeonghui learned the flow of Yanjing scholarship and literature from his teacher Pak Jega. When he was 24, he followed his father Kim Nogyeong on an envoy’s trip to Yanjing as a jaje gungwan (子第軍官 the ambassador’ son or disciple as unofficial military officer). It was at that time when he was moved and influenced by Weng Fanggang (翁方綱, 1733-1818) and Ruan Yuan (阮元, 1764-1849), leaders of Qing period scholarship. After passing the civil service exam in 1819, he held posts such as Chancellor of the National Academy (成均館 大司成 senior-3 rank), Vice-Minister of War (兵曹參判 junior-2 rank), and Superintendent of State Tribunal (判義禁府事 senior-1 rank).
He investigated epitaphs together with Jo Inyeong (趙寅永, 1782-1850) to find the Monument for King Jinheung (眞興王, r.540-576 in Silla Kingdom), and he opened the Silhak academic tradition with the silsa gusi (實事求是), influencing many scholars after him. In his late 40s, he was exiled to Jeju Island for 9 years because of his involvement with the Yun Sangdo (尹尙度, 1768-1840) incident. After he was freed, he was exiled again to Bukcheong county, Hamgyeong province, for 2 years for getting involved in the Kwon Donin (權敦仁, 1783-1859) incident. Then, after immersing himself in scholarship and literature during his retirement in Gwacheon (果川) near Seoul, he left the world in 1856.
3. Works
Kim Jeonghui burned two original manuscripts not wanting to gain a reputation as a writer. Because of this, his students such as Nam Byeonggil (南秉吉, 1820-1869) published Damyeojae sigo (覃揅齋詩藁 Collection of Damyeonjae’s Poems) in 7 chapters of 2 volumes in 1876 after collecting original manuscripts left behind by their teacher. Other publications that included his works were Wandang cheokdok (阮堂尺牘 Wandang’s Short Writings and Letters; 2 chapters of 2 volumes, compiled by Nam Byeonggil, 1867), Damyeojae sigo (7 chapters of 2 volumes, 1867), and Wandang Seonsaengjip (阮堂[先生]集 Collected Works of Wandang, 5 chapters of 5 volumes, compiled by Nam Byeonggil, 1868). There were also the 110 chapters of 5 volumes of Wandang Seonsaeng Jeonjip (阮堂先生全集 Completed Writings of Wandang). It was a collection of his works with a final supplement of other existing pieces of writing that his descendant Kim Ikhwan (金翊煥, 1898-1978) published in 1934.
In the field of poems, writing, and painting, one must search his established human network in the Qing dynasty to focus on his thoroughly outstanding repertoire. This is because his associations with Qing period scholars in Yanjing played an important function for his scholarship and literature.
3.1. Background of Creation
When Kim Jeonghui was 24, he cultivated himself by following his father on the envoy’s trip to Yanjing [presently Beijing] in 1809. For two months, while he was settled in Yanjing, he had such fellowship with the Qing dynasty’s leading Chinese scholars in arts and sciences such as Ruan Yuan (阮元, 1765-1848), Weng Fanggang (翁方綱, 1733-1818). Besides them, he also met and associated with such as Zhu Henian (朱鶴年, 1760-1844), Li Dingyuan (李鼎元, 1750-1805), Cao Jiang (曹江, 1781-1837), Xu Song (徐松, 1781-1848), Weng Shupei (翁樹培, 1764-1811?), Weng Fanggang (翁樹崑, 1733-1818), Xie Xuechong (謝學崇, 1783-1840), and Li Linsong (李林松, 1770-1827). It was a time period when the level of Kaozheng xue in Yanjing was reaching its peak. While collaborating with the most erudite scholars of the period like Ruan Yuan and Weng Fanggang, Kim Jeonghui studied at the highest level of Kaozheng xue. Astonished by Chusa’s extraordinary talent, Weng Fanggang extolled, “His knowledge of the study of Confucian classics and his writing are number one in Haedong (海東 [Korea]),” and Kim created the pen name Wandang (阮堂) for his collaborations with Ruan Yuan.
In particular, Kim Jeonghui’s meeting with Ruan Yuan in Yanjing was his lucky break. Ruan Yuan was a highly respected scholarly figure in Joseon and the Qing dynasty. Ruan Yuan and Kim’s teacher Pak Jega also knew each other. At age 46, Ruan Yuan was moved by Kim’s deep knowledge and brilliance. From that point on, Kim continued scholarly exchanges with Ruan Yuan through letters and books even after returning home. In particular, there was the enormous Shi san jing zhu shu: fu jiao kan ji (十三經 注疏: 附校勘記 Commentaries and Explanations to the Thirteen Classics) of 245 chapters among the books Ruan Yuan sent Kim; and the depth of the two’s exchanges can be known when one looks at it closely. Kim created the pen name “Wandang (阮堂)” to mean that he was taking Ruan Yuan as his teacher and liked to use Wandang over the pen name “Chusa (秋史)” after the envoy’s trip to Yanjing.
Weng Fanggang’s influence on Kim Jeonghui’s writings was enormous as well. Weng was the most respected epigraphist and calligrapher in the Qing dynasty during that period, a master of the Confucian classics, and a veteran of the academy who was even skilled in Poetry, Calligraphy, and Painting. He participated in the compilation of Siku Quanshu (四庫全書 The Complete Library in Four Sections) and spent some time in a position at the Directorate of Education (國子監). Weng spent his days studying the Confucian classics in his private library after retiring at the advanced age of 78. At that time, Kim went to Weng Fanggang’s library in the first month of 1810 and they exchanged conversations through writings.
Weng acknowledged the depth of Kim’s scholarship in Song period philosophy because the scholarship of the Qing period not only gave weight to Confucian classics scholarship of the Song period (宋代) but Confucian classics scholarship of the Han period (漢代). In his private library, Weng showed Kim Su Shi (蘇軾, 1037-1101)’s Tian ji wu yun tie (天際烏雲帖 Dark Clouds at the Edge of the Sky) original version and gifted him many books, writings, and rubbings. He and Kim ceaselessly exchanged scholarly problems through letters long after Kim had returned home.
In this way, in meeting two leaders of the Qing period academy during the envoy’s trip to Yanjing, Kim received a significant amount of influence on his scholarship and art.
3.2. Representative Works
As mentioned before, Kim Jeonghui, not wanting a reputation as a writer, burned two of his manuscripts. Those such as Nam Byunggil who studied under his instruction, in the winter of 1867, compiled his poems to publish the 7 chapters of 2 volumes of Damyeojae sigo. One year later, in 1868, his students compiled his short pieces of writings and letters to separately publish the 2 chapters of 2 volumes Wandang cheokdok. Consequently, Kim Jeonghui’s works were published four times. That is, there was Wandang cheokdok (阮堂尺牘 2 chapters of 2 volumes, 1867), Damyeojae sigo (覃揅齋詩藁 7 chapters of 2 volumes, 1867), Wandang [Seonsaeng]jip (阮堂[先生]集5 chapters of 5 volumes, 1868), and his descendent Kim Ikhwan published Wandang Seonsaeng jeonjip (阮堂先生全集10 chapters of 5 volumes, 1934). This book is presently housed at Korea University, National Library of Korea, and Sungkyunkwan University. Each work’s structure and content is approximately the following:
1) Wandang cheokdok, in 2 chapters of 2 volumes, is made up of the first book and the last book. At the beginning of the work, there is a preface by Uisan (義山) Nam Byeonggil (南秉吉). In the first volume of the book, there are 8 letters, which he wrote to Heungseon Daewongun (興宣大院君 1821-1898; father of King Kojong), Kwon Donin (權敦仁), Nam Byungchul (南秉哲), Kim Byeonghak (金炳學, 1821-1879), Kim Jeonghui’s brother Kim Myeonghui (金命喜, 1788-1857), Jo Wonho (趙寃鎬, ?-?). In the second volume, there are 12 letters. Thesehe sent to Sim Huisun (沈熙淳, 1819-?), Sin Gwanho (申觀浩, 1810-1888), Jang Insik (張寅植, ?-?), Yi Sangjeok (李尙迪, 1804-1865), Hong Hyeonbo (洪顯普, 1815-1896?), Kim Seokjun (金奭準, 1831-1915), O Gyeongseok (吳慶錫, 1831-1879), O Gyuil (吳圭一, 18??-18??), and Buddhist monks Baekpa (白波, 1767-1852) and Choui (草衣, 1786-1866). At the end of the volume, there are also Dokoeyeoon (牘外餘言) and Gayasan Haeinsa Junggeon Sangryangmun (伽倻山海印寺重建上樑文).
2) Damyeojae sigo: in 7 chapters of 2 volumes. At the beginning of the work, there are Sin Seokhui (申錫禧, 1808-1873)’s preface and Nam Byeonggil’s jesa (題辭 a related piece of writing such as a song or poem at the beginning of a work). Both first and second volumes include Kim Jeonghui’s poems categorized under penta-syllabic (五言), hepta-syllabic (七言), as well as ancient-style poetry (古詩), regulated eight-line verse (律詩), regulated-verse quatrain (絶句).
3) Wandang [Seonsaeng]jip: in 5 chapters of 5 volumes. At the beginning of the work, there is Nam Byeonggil’s foreword (識) and Wandang Kim-gong Sojeon (阮堂金公小傳 Kim’s Abridged Biography) by Min Gyuho (閔奎鎬, 1836-1878). In chapter 1, there are 5 pieces of so (疏 memorial), 10 pieces of seo (書 letters), and 37 pieces of mundap (問答 answering question); in chapter 2 are 2 pieces of seo (序 preface), 3 pieces of gi (記 record), 4 pieces of jemun (祭文 offering), 1 piece of sangryangmun (上樑文 beam-raising blessing), 6 pieces of go (考 study), 7 pieces of byeon (辨 debate), 6 pieces of seol (說 discourse), 1 piece of non (論 treatise), 5 pieces of myeong (銘 inscription) and miscellany, 12 pieces of bal (跋 postface); and in chapter 3, there are 72 pieces of cheokdok (尺牘 short writings and letters). In chapter 4, there are byeollok (別錄 separate records) and in chapter 5 are si (詩 poem).
4) Wandang Seonsaeng Jeonjip: in 10 chapters of 5 volumes. At the beginning of the work, there are four prefaces (序) by Kim Yeonghan (金寗漢, 1878-1950), Jeong Inbo (鄭寅普, 1893-1950), Sin Seokhui, and Nam Byeonggil, and an abridged biography by Min Gyuho. In chapters 1-5 are 5 pieces of go (攷 Comprehensive Study), 6 of discourse, 3 of debate, 5 of memorial, 108 of short writing and letters; in chapters 6-8, there are 2 of preface, 3 of record, 7 of postface, 1 of commentary (箋), 1 of inscription, 1 of eulogy (頌), 1 of admonition (箴), 1 of beam-raising blessing, 4 of offering, 2 of grave memoirs (墓誌), 17 of miscellany; and in chapter 9 and 10 are 240 of poems. Among them, a work like Jinheung ibigo (眞興二碑攷) is a masterpiece of Korean epigraphy, and Silsa gusiseol (實事求是說) is a piece that paved a new path together with an explanation of Silhak’s ideological objectives.
Besides these, Kim Jeonghui left behind many high-quality Hangul (Korean alphabet) letters. More than 40 handwritten letters have been found so far. For the most part, they are those he wrote to his wife and daughter-in-law during his Jeju Island exile. They are much more valuable than Hanmun (Chinese character) letters when considering their impact on Korean literature.
4. Style and Legacy
Kim Jeonghui instituted the academic traditions of Silhak’s ideology, silsa gusi, as an intellectual who symbolized the 19th century, grafting Kaozheng xue onto epigraphy, and he opened up new directions for Silhak, influencing many who came after him. However, though Kim was a Silhak scholar, he transcended the domains of scholarship and art to have an extraordinary influence on all of late-Joseon culture. He was a key figure who symbolizes the 19th century Joseon’s cultural code. “Chusa’s Writing Style (秋史體)” and “Winter Scene (歲寒圖)” blew “a Wandang wind” in late-Joseon culture, causing big reverberations in arts and sciences of the period. Besides this, his grasp of the Qing period scholarship was more exacting than anyone else and, in return, he transmitted new theories and senses to the academic and artistic fields of Joseon.
For some time, the historical assessment of Kim Jeonghui was not of singular praise. His utilization of the Qing period scholarship and epigraphy for the Monument for King Jinheung of Silla that he found has been acknowledged as the very best in East Asia. His archaeological method through epigraphy established new directions for Silhak through silsa gusi. Nevertheless, Kim has also received criticism that his proliferation of Qing dynasty literature in Joseon discolored the golden age of Jingyeong Culture (眞景文化) native to Joseon for King Yeongjo and King Jeongjo periods.
This is also true in literature. Kim Jeonghui’s poetics, which utilized the Qing period Xingling Theory (性靈說), provided a brand new scholarly stage that has been favorably received. However, a section of scholars has criticized that it was merely a high-brow poetics that disregarded the rest of reality, stressing only Kaozheng xue’s epigraphy in the Qing dynasty.
However, the fact that he was the very best scholar of arts and sciences of East Asia who dealt with art and literature from a scholarly perspective does not change. This is because the scholar’s form as the poet and the calligrapher was exposed in one person, Kim Jeonghui. In particular, the literary accomplishments based on Kim Jeonghui’s Kaozheng xue grants Silhak ideology its excellence and its value.
5. Sources
[Youtube], Chusa Kim Jeonghui, EBS Gihoek Siriju: Hanguk Inmulsa Yeonsok Teukgang
https://youtu.be/nUqYZzNyH4o
[Youtube], Chusa Kim Jeonghui’s Wandang Sehando, KBS Yeoksa Jeoneol Gu Nal
https://youtu.be/87N-WBazUvs
6. References and External Links
6.1. References
Jeong, Min, 18-segi Han-Jung Jisigin ui Munye Gonghwaguk [The Republic of Literature and Arts for Korean-Chinese Intellectuals in the 18th century], Munhak Dongne, 2014.
Yu, Hongjun, Chusa Kim Jeonghui [Chusa Kim Jeonghui], Changjak gwa Bipyeong, 2018.
Pak, Chulsang, Sehando [Winter Scene], Munhak Dongne, 2010.
Pak, Chulsang, Chusa Kim Jeonghui Geumseokhak Yeongu [Study on the Epigraphy of Chusa, Kim Jeonghui], Keimyung University Master’s Thesis, 2011.
Fujitsuka, Chikashi, Chusa Kim Jeonghui Yeongu [Study of Chusa Kim Jeonghui], Gwacheon Munhwawon, 2008.
Lee, Cheolhui, Chusa Kim Jeonghui Siron Yeongu: Jungguk Siron ui Suyong gwa Jojeong reul Jungsim euro [Study on Poetics of Chusa Kim Jeonghui: Focused on His Acceptance and Adjustment of Chines Classic Poetics], Sungkyunkwan University Doctoral Dissertation, 2001.
Jeon, Garam, Chusa Kim Jeonghui Siron Yeongu: Cheongdae Geonga Sigi Siron ui Suyong gwa Byeonyong eul Jungsim euro [Study on poetics of Chusa Kim Jeonghui: Focused on His Acceptance and Transformation of Qing Dynasty Qianlong-Jiaqing period’s poetics], Jeonbuk National University Doctoral Dissertation, 2018.
6.2. External Links
[Encyclopedia of Korean Culture], Kim Jeonghui [金正喜]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10428
[Encyclopedia of Korean Culture], Jinheongwang Sunsubi [眞興王 巡狩碑]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55015
[Korean Classics Comprehensive DB], Wandangjip [阮堂集]
http://db.itkc.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