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oe Chiwon (857–10th century) was the first Korean poet to achieve international acclaim for his Chinese verse.
Life
Choe Chiwon was a Korean philosopher, poet, historian, and government official of the late medieval Unified Silla period (668-935). He studied for many years in Tang China, passed the Tang imperial examination, and rose to the high office there before returning to Silla, where he made ultimately futile attempts to reform the government of a declining Silla state. In his final years, Choe turned to Buddhism and became a hermit scholar residing in and around Haeinsa temple. Choe is also known by the courtesy names Goun (孤雲), Haeun (海雲), and Haebu (海夫), and his posthumous title is Munchang (文昌). A major figure of history and literature in his own right, his life story appears in the Samguksagi (三國史記 History of the Three Kingdoms) under the title Choe Chiwonjeon (崔致遠傳 The Tale of Choe Chiwon). Other novels based on his life include Choe Chiwon (崔致遠, unknown creation date) and Choe Gounjeon (崔孤雲傳, 16th century).
Writing
The relatively extensive extant writings of Choe stand as witness to his importance in late Silla society while also ensuring him a degree of importance among latter generations that has escaped his contemporaries, many of whom, like him, were talented poets, learned officials, and diligent in their attempts at reform.
Besides his lost works such as Jewang yeondaeryeok (帝王年代曆 Chronological History of Monarchs), Choe's surviving writings may be divided roughly into four main categories: official prose (to include memorials, dispatches, etc. during his service both in Tang China and Silla); private prose (on such topics as tea drinking and natural scenery); poetry; and stele inscriptions.
Shortly following Choe's return to Silla in 885, he compiled his various writings, both official and unofficial (to include some poetry), and presented it to King Heongang. The preface to that compilation survives, allowing us to know its original contents, but the entire collection is no longer extant. What does survive is one part entitled the Gyeweon Pilgyeong (桂苑筆耕 Plowing the Cassia Grove with a Writing Brush), which is ten volumes made up primarily of official letters and memorials composed while in the service of Tang. This work also includes some private prose.
A sizable collection of Choe's poetry, which was presumably originally included in the work presented to King Heongang cited above, has come down to us through other Korean sources, primarily the Dongmunseon (東文選 Collection of Korean Verse). Some verses of his are also included in the 12th century Samguk Sagi.
Choe made significant contributions to the establishment of Chinese-script literature in Korea through his compositions across various Chinese poetry genres, including modern-style poetry. Lee Kyubo (1169-1241) revered him as Dongguk Munjong (東國文宗 Emperor Wenzong of the East), and Seo Geojeong (1420-1488) praised Gyewonpilgyeong with the words, “all of the anthologies in the East follow Gyewonpilgyeong; thus, it is the start of our Korean art history." The writings of Choe were famous enough to be cited in Shun Tang Shu Yu Wen Zhi (新唐書 藝文志 The Treatises of the New Book of the Tang Dynasty).
최치원(857~미상)은 통일신라신대의 학자이며 문장가다.
생애
최치원은 857년에 태어났다. 신라 골품제에서 6두품(六頭品)으로 신라의 유교를 대표할 만한 많은 학자들을 배출한 최씨 가문출신이다.
최치원은 868년(경문왕 8)에 12세에 당나라로 유학을 갔다. 당나라에 유학한지 7년만인 874년에 18세의 나이로 예부시랑(禮部侍郎) 배찬(裵瓚)이 주관한 빈공과(賓貢科)에 합격하였다. 그리고 2년간 유랑하면서 시작(詩作)에 몰두하였다. 그 때 지은 작품이 《금체시(今體詩)》(5수 1권), 《오언칠언금체시(五言七言今體詩)》(100수 1권), 《잡시부(雜詩賦)》(30수 1권) 등이다.
최치원이 문명(文名)을 떨치게 된 것은 879년부터 4년간 고변의 군막(軍幕)에서 표(表)·장(狀)·서계(書啓)·격문(檄文) 등을 제작하는 일을 맡었던 때부터다. 그 공적으로 879년 승무랑 전중시어사 내공봉(承務郎殿中侍御史內供奉)으로 도통순관(都統巡官)에 승차되었다. 당시 최치원이 썼던 글 중에서 〈격황소서(擊黃巢書)〉(일명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은 명문으로 이름이 높다.
885년 당나라에서 귀국할 때까지 당나라의 여러 문인들과 사귀었고 이로 인해 《당서(唐書)》 예문지(藝文志)에도 그가 쓴 글의 제목이 수록되었다.
29세에 신라로 돌아오자, 헌강왕에 의해 시독 겸 한림학사 수병부시랑 지서서감사(侍讀兼翰林學士守兵部侍郎知瑞書監事)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국내에서도 문명(文名)을 떨쳐 귀국한 다음해에 왕명으로 〈대숭복사비문(大崇福寺碑文)〉 등의 글을 남겼고, 당나라에서 지은 저작들을 정리해 국왕에게 진헌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신라사회는 이미 붕괴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지방에서 호족세력이 대두하면서 중앙정부는 주(州)·군(郡)의 공부(貢賦)도 제대로 거두지 못해 재정이 궁핍했다. 889년(진성여왕 3)에는 농민들이 사방에서 봉기해 전국적인 내란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에 최치원은 895년 전국적인 내란의 와중에서 사찰을 지키다가 전몰한 승병들을 위해 만든 해인사 경내의 한 공양탑의 기문(記文)에 당시의 처참한 상황을 기록했다.
한편 최치원은 당나라에서 귀국한 뒤, 처음에는 상당한 의욕을 가지고 당나라에서 배운 것을 실천하려 했지만, 진골귀족 중심의 독점적인 신분체제의 한계와 국정의 문란함을 깨닫고 외직을 지원해, 중앙정부로부터 거리를 두었다.
894년에는 시무책(時務策) 10여 조를 진성여왕에게 올려서 문란한 정치를 바로잡으려고 노력하였다. 최치원은 중앙의 관직과 지방관직을 역임하면서, 중앙 진골귀족의 부패와 지방세력의 반란 등의 사회모순을 목격한 결과, 개혁안을 제시한 것이다. 시무책은 진성여왕에게 받아들여져서 6두품의 신분으로서는 최고의 관등인 아찬(阿飡)에 올랐으나 그의 개혁안은 진골 귀족들의 반대로 실현될 수 없었다. 신라왕실에 대한 실망과 좌절감을 느낀 최치원은 40여 세에 관직을 버리고 소요하다가 은퇴를 결심했다.
은퇴한 이후의 최치원의 행적은 알려진 것이 없다. 최치원은 사회적인 전환과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지 못하고 은거 생활로 일생을 마치고 말았으나, 역사적 현실에 대한 고민은 그의 후계자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작품 세계
최치원이 중심을 삼았던 학문의 기본은 유학(儒學)이었다. 그는 유학을 단순히 불교의 부수적인 것으로 이해하거나, 왕자의 권위수식에만 이용하던 단계를 지나 새로운 정치이념으로 내세우면서, 골품제도라는 신라사회의 족적 편제방법(族的編制方法)을 부정하는 방향으로 발전시켰다. 최치원이 유교와 관련해 남긴 성과는 최승로(崔承老)로 이어져 고려국가의 정치이념으로 확립된다.
그는 유교사관에 입각해서 역사를 정리하였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연표형식으로 정리한 《제왕연대력(帝王年代曆)》이다. 《제왕연대력(帝王年代曆)》은 오늘날 남아 있지 않아 그 내용은 알 수 없으나 가야를 포함해 삼국, 통일신라, 중국의 연표가 들어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한편 최치원은 자신을 유학자로 자처하면서도 불교에도 깊은 관심을 가져 승려들과 교유하고, 불교관계의 글들을 많이 남기고 있었다. 불교 중에서도 특히 종래의 학문불교, 체제불교인 화엄종의 한계와 모순을 비판하는 선종(禪宗)에 주목했다.
최치원은 신라의 문화적 전통 속에서 성립된 향가문학(鄕歌文學)과 대립되는 새로운 문학 장르를 개척하였다. 그가 만든 것은 절제된 형식이 특징인 변려문체(騈儷文體)였다. 《동문선》과 《계원필경》에 상당수의 시문(詩文)이 수록되어 전하고 있으며, 당시 만당시풍(晩唐詩風)과 구별되었다.
또한 그는 당시 신라사회의 전환을 위해 추진되고 있었던 풍수지리설에도 상당한 이해를 가지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최치원은 유학자라고 자처하면서 유교 외에 불교나 노장사상, 심지어는 풍수지리설까지도 이해하고 있었다. 특히, 유교와 불교의 조화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데, 〈난랑비서문(鸞郎碑序文)〉을 비롯한 그의 글 여러 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최치원의 많은 저술 중에 오늘날 전해지는 것은 《계원필경》, 《법장화상전》, 《사산비명(四山碑銘)》뿐이다.
주요 작품
1) 시문집
《계원필경》(20권)
《법장화상전》,
《사산비명》
《금체시》(5수 1권)
《오언칠언금체시》(100수 1권)
《잡시부》(30수 1권)
《중산복궤집》(1부 5권)
《사륙집(四六集)》(1권)
2) 기타
《부석존자전》(1권)
《법장화상전》(1권)
《석이정전》
《석순응전》
《사산비명(四山碑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