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
- Original Title
- 삼국사기
- Title Romanization
- Samguksagi
- English Title (Printed)
- -
- Classification
-
KDC구분 > History
- Author
- Kim Busik
- Co-Author
- -
- Published Year
- 1145
- Publisher
- -
- ISBN
- -
- Main Characters
- -
- Subject/Theme
- -
- Kim Busik
- Birth : 1075 ~ 1151
- Occupation : Historian
- First Name : Busik
- Family Name : Kim
- Korean Name : 김부식
- ISNI : 000000008382438X
- Works : 10
- Korean(한국어)
- English(English)
삼국사기
박 동욱 (한양대)
소개
1145년(인종 23)에 김부식(金富軾)등이 고려 인종의 명에 따라 편찬한 삼국시대의 정사이다. 중국의 정사체인 기전체의 역사서로서 본기 28권(고구려 10권, 백제 6권, 신라 · 통일신라 12권), 지(志) 9권, 표 3권, 열전 10권으로 되어 있다.
12세기의 시대정신과 사회상을 고려할 때, 당시의 중국 중심의 풍조 속에서도 우리 나라를 찾으려는 노력이 엿보이고 있다. 따라서, 이 책은 중국의 전통적인 사학이 가지고 있는 술이부작(述而不作)의 객관적 서술 자세를 이 땅에 뿌리내리게 하였다. 특히, 정부 주도하의 관찬(官撰)이라는 역사 편찬의 본을 정착시켜 조선 초의 역사 서술, 특히 『고려사』 편찬에 기여함으로써 전통 사학을 크게 발전시켰다.
2. 작가
김부식(金富軾, 1075~1151)은 본관은 경주(慶州)로 자는 입지(立之)이고 호는 뇌천(雷川)이다. 아버지 김근(金覲)은 자식들을 송나라의 대문호인 소식(蘇軾), 소철(蘇轍) 형제처럼 키우려고 그들을 본떠서 부식(富軾), 부철(富轍)로 이름을 지었다.
김부식은 1096년(숙종 1) 과거에 급제해 여러 관직을 거쳤다가 한림원의 직한림(直翰林)에 발탁되었다. 이후 20여 년 동안 한림원 등의 문한직(文翰職)에 종사하면서 자신의 학문을 발전시켰고 한편으로는 예종(睿宗)·인종(仁宗)에게 경사(經史)를 강론하기도 하였다.
1116년(예종 11) 7월에 문한관으로서 송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오는 길에 사마광(司馬光)의 『자치통감(資治通鑑)』 한 질을 가지고 왔다. 1127년 송나라에 고종(高宗)의 등극을 축하하러 갔으나 금나라 군에 의해 수도가 함락되어 남천(南遷)을 하였으므로 수도에 가보지도 못하고 돌아왔다.
1130년(인종 8) 12월에 재상직에 오른 후 순조로운 승진을 거듭하였다. 1135년(인종 13) 1월 묘청의 난에 원수(元帥)로 임명되어 직접 중군을 거느리고 삼군(三軍)을 지휘 통솔해 진압을 담당하였다. 출정하기에 앞서 재상들과 의논해 먼저 개경에 있던 묘청의 동조세력인 정지상(鄭知常)·김안(金安)·백수한(白壽翰) 등의 목을 베었다. 1년 2개월이 지나서야 반란군을 진압할 수 있었다. 김부식은 서경에서 개선한 뒤 윤언이(尹彦頤)와 한유충(韓惟忠)을 좌천시키려다 실패하였다. 윤언이·한유충이 중앙정계로 복귀할 전망이 보이자 정치보복을 염려해 세 번이나 사직상소를 올려 결국 왕의 허락을 받아냈다.
이후 김부식의 형제들이 죽고, 자신의 우호세력인 정습명(鄭襲明)마저 탄핵을 받아 퇴임하자 그도 역시 정치일선에서 물러났다. 만년(晩年)에는 개성 주위에 관란사(觀瀾寺)를 원찰(願刹)로 세워 불교수행을 닦기도 하였다.
관직에서 물러난 후 왕은 김부식을 도와줄 8인의 젊은 관료를 보내어 『삼국사기(三國史記)』의 편찬을 명하였으며, 1145년(인종 23)『삼국사기(三國史記)』를 편찬했다. 이 밖에도『예종실록(睿宗實錄)』과『인종실록(仁宗實錄)』의 편찬도 담당하였다.
문집은 20여 권이 되었으나 현전하지 않는다. 그러나 많은 글들이 『동문수(東文粹)』와 『동문선(東文選)』에 전해져 온다. 1151년(의종 5)에 76세의 나이로 죽자 중서령(中書令)에 추증되었다.
3. 내용
『삼국사기』의 서술방식은 『신당서(新唐書)』를 모방하였다. 기(紀)·전(傳)·표(表)·지(志)로 구성하여, 28권의 본기, 3권의 연표, 9권의 지, 10권의 열전으로 되어 있다. 본기는 '신라본기' 12권, '고구려본기' 10권, '백제본기' 6권으로 구성되었다.
본기는 책 전체의 절반이 넘는 분량으로 내용상으로도 가장 큰 비중을 갖고 있다. 이 점이 열전을 중심으로 편제되어 있는 중국의 기전체 역사서와 다른 점으로 지적된다. 또 삼국 각각의 대외관계를 서술하는 경우, 신라본기에서는 신라를 주체로 하여 '아'(我)로 표현했고, 고구려·백제의 경우도 동일하게 처리했다. 이러한 용법은 중국 측의 역사서에서도 유례가 없는 것으로, 삼국을 동등하게 서술하고자 한 자세가 반영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본기에서는 서두에 왕과 왕비의 인적 사항을 기록한 후 1년 단위의 정치 업적, 자연재해, 자연현상, 중요 관리의 임면 기사, 전쟁기사, 외국과의 사신파견 등을 기록하였다. 이 가운데 자연변이는 인간의 활동과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에서 실었던 듯하다. 그리고 1년 단위의 기술에서는 춘하추동의 사계절을 밝히고 있는데 이는 중국식 역사 서술방식을 차용한 것이다. 삼국의 본기에서는 삼국 간에 그칠 줄 모르는 전쟁의 참혹함을 읽을 수 있다.
연표에서는 삼국의 연표를 중국의 연표와 대비하여 만들었는데, 삼국의 본기가 모두 각 왕의 재위년도로 기술되었기 때문에 연표가 없이는 절대연대의 파악이 불가능하다. 박혁거세 즉위년(서기전 57)부터 경순왕 9년(935)까지를 연표 3권으로 나누고 있다. 이는 중국문헌의 연표에 재상표(宰相表) · 종실표(宗室表) · 방진표(方鎭表)가 있는 경우를 대조할 때 그 내용이 빈약하고 간소하다.
지는 통치제도 등을 분야별로 기술한 것이다. 지를 잡지(雜志)라 명명한 것은 지에 서술할 자료가 많지 않으므로 한 권의 지에 여러 분야를 합쳐서 기술했기 때문이다. 대부분 신라를 중심으로 통일기의 상태에 관한 것이지만 삼국시대의 것들도 포함되어 있다. 구성은 제사(祭祀)·악(樂)·색복(色服)·거기(車騎)·기용(器用)·옥사(屋舍)·지리(地理)·직관(職官)의 순서로 되어 있다. 중국의 기전체 역사서와 비교해보면, 예(禮)·오행(五行)·천문(天文)·역(曆)·식화(食貨)가 없기 때문에 체제상 미숙한 편제라는 지적을 받는다. 제사, 음악, 복식, 수레, 집에 대한 지 2권, 지리지 4권, 직관지 3권으로 되어 있다. 잡지에서는 삼국의 내용을 서술하려고 하였으나 고구려와 백제 측의 자료는 본기 외에는 별도로 전하는 자료가 없어 중국 측의 자료를 인용하는 수준을 넘지 못했다.
열전 10권은 중국문헌에 비하면 매우 빈약한 편이다. 따라서 인물기준도 항목별(名臣 · 循吏 · 酷吏 · 儒林 · 叛逆 등)로 된 것도 아니고, 왕후 · 공주열전도 없다. 모두 50명의 인물이 실려 있으나 독립된 인물에 부기되어 소개된 것까지 합치면 70여 명 이상에 달한다. 국적에 따라 분류해보면 신라인이 압도적인 다수를 차지한다. 그리고 신라인 중에서도 통일 이전의 인물이 대부분이다. 이렇게 양적인 면에서 신라인이 차지하는 비중이 월등히 높은 것은, 편찬 당시 신라인에 대한 기록이 상대적으로 많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인상적인 것은 김유신(金庾信) 개인 열전이 3권이나 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고구려인의 경우에는 온달(溫達) 열전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본기의 기사나 중국문헌에서 옮겨온 것이다. 백제인의 경우, 흑치상지는 『구당서(舊唐書)』에서 옮겨온 것이며 계백(階伯)은 백제본기의 내용을 약간 부연했고 도미(都彌)만 새로 수록된 것이다. 특히, 7세기에 활약한 인물이 34인이고 나라를 위하여 죽은 사람이 21인이나 되고 있어 위국충절(爲國忠節)의 인물나열이 핵심이 된다.
『삼국사기』에서 주목되는 부분은 논찬이다. 논찬이란 역사서술에 있어서 사신의 견해를 나타낸 사론(史論)을 말하는바,『삼국사기』에는 논과 찬을 구별하지 않고 모두 논이라 하였다. 『삼국사기』에는 신라본기에 10측, 고구려본기에 7측, 백제본기에 6측, 열전에 8측 등 모두 31측의 논찬이 있다. 그 내용은 대개 예법준칙, 유교적 덕치주의, 군신의 행동, 사대적인 예절 등이 중심이 되지만 그러한 유교적 명분과 춘추대의(春秋大義)를 견지하면서도 우리 현실과 독자성을 고려한 현실주의적 입장을 띠고 있다. 그것은 내물왕의 동성취처(同性娶妻)나 혁거세의 왕후동반순행을 옹호한 점이나, 신라 3보(寶)와 할고지효(割股之孝)를 비현실적인 것으로 비난한데 나타나 있다.
4. 의의
『삼국사기』는 고려 인종 23년(1145)에 김부식 등이 편찬한 최고의 사서다. 그것은 삼국 및 통일신라 역사 연구의 기본 사료로서 가치가 매우 클 뿐 아니라 그 후에 편찬된 사서들의 전범(典範)이 되었다는 측면에서 의의가 크다. 그런데 지금까지 『삼국사기』에 대한 평가는 호의적인 편이 아니었다. 특히 일제강점기에 민족주의 사학자들이 더욱 그러하였다. 그들은 『삼국사기』를 사대주의 사서의 전범으로 인식하였을 뿐 만 아니라, 이 책의 사료 가치를 극도로 폄하하고, 기사의 사실성에 대해서도 강력한 의문을 제기하였던 것이다. 민족주의 사학자들의 김부식과 『삼국사기』에 대한 일방적 매도는 해방 후 삼국사기 에 대한 심층적인 연구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하였을 뿐만 아니라 삼국 및 통일신라 역사 연구 및 올바른 국민들의 역사인식에도 적지않은 폐해를 낳았다고 말할 수 있다
『삼국사기』는 국가의 발달사 중심으로 서술되어 있지만, 이외에도 고대의 신화와 전설, 제사에 대한 관념, 신앙, 종교, 생활 관습, 언어와 문자생활, 예술, 인간의 구체적인 삶의 모습 등에 관한 다양한 기록을 담고 있어 고대 문화 전체를 파악할 수 있는 자료이다. 열전 등에 기사의 서술을 대화체로 서술하여 지루한 감을 덜어주고 서술을 박진감 넘치게 하고 있다. 그러나 대화 중에 언급된 표현이 중국 고전으로부터 인용된 경우 좀 더 권위를 갖추기 위해서 유사한 내용을 김부식이 대치했을 가능성도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
『삼국사기』는 정치사를 중심으로 서술된 총체적인 역사서다. 또 김부식은 문헌존중주의의 입장을 견지하였다. 이에 비해 일연의 『삼국유사』는 『삼국사기』를 전제하고 쓰여졌기 때문에, 『삼국사기』에서 다루어지지 않은 것들을 기록할 수 있었다. 『삼국사기』가 삼국의 흥망에 관한 역사서라면, 『삼국유사』는 고조선시대로부터 삼국시대 말까지의 국가를 다뤘다는 점에서도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는 김부식의 합리적인 역사관과, 일연의 연기설 중심의 불교사관의 차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일연의 『삼국유사』는 고대의 일화를 그대로 전해줌으로써, 한국의 고대를 보다 원형에 가깝게 전하고 있다. 또 『삼국유사』는 불교의 신앙사라는 점에서 『삼국사기』와 크게 다르다. 그러나 단순한 신앙사가 아니라 『삼국사기』에서 제외된 신라의 각 왕들에 대한 설화를 많이 전하고 있어 『삼국사기』를 보충하는 역사서다.
『삼국유사』를 민족지(民族誌)의 성격으로 파악하는 견해가 있다. 삼국시대 향가에 대한 기록 등 아주 소중한 자료가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를 빼놓고 『삼국유사』만으로는 한국의 역사를 복원할 수 없다.
한국의 고대사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사서를 함께 읽어야 한다. 두 역사서는 우리 민족의 문화적 성격을 전해주는 고전이라 할 수 있다. 두 고전의 이러한 성격을 제대로 이해하고 또 새롭게 해석할 때에야 앞으로 우리의 새로운 문화의 창조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5. 참고문헌
『역주삼국사기』 (5책) (김부식 저, 정구복 외 옮김,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7)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동문선(東文選)』
『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중세사학사』(정구복, 집문당, 1999)
『삼국사기연구』(신형식, 일조각, 1981)
『국어국문학자료사전』 (한국사전연구사, 1998)
『한국의 고전을 읽는다』 (정구복 외, 휴머니스트, 2006)
「삼국사기 해제」(정구복, 『역주삼국사기』1-감교원문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김부식」(정구복, 『한국사시민강좌』9, 일주각, 1991)
「윤언이묘지명」(이난영 편, 『한국금석문추보』, 아세아문화사, 1976)
「민족주의 사학자의『삼국사기』인식」(전덕재,『역사와현실』,한국역사연구회, 2006)
「『삼국사기』 본기 기사의 계통적 복원을 성취한 노작 : 전덕재, 『삼국사기 본기의 원전과 편찬』」(임기환, 『한국고대사연구』, 2018)
다음백과사전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b11s1799b003
6. 번역현황
6.1. 중국어
Ким Бу сик et al. и др., Самкук Саги том, Восточная Литература, 2001.
6.2. 베트남어
Kim Phú Thức, TAM QUỐC SỬ KÝ 1, NXB Phụ Nữ. 2017.
6.3. 일본어
金富軾 , 『完訳 三国史記』, 明石書店, 1997.
Samguk Sagi (三國史記 History of the Three Kingdoms)
1. Introduction
Samguk Sagi is an official historical record of the Three Kingdoms era compiled by Kim Busik (金富軾, 1075-1151) and others in 1145 by the order of King Injong (仁宗 r. 1122-1146) of Goryeo dynasty (高麗 918-1392). As a history book of the chronicle writing style, which is a Chinese historiographical tradition, Samguk sagi includes 28 chapters of annals (本紀 bongi: 10 chapters of Goguryeo, 6 chapters of Baekje, 12 chapters of Silla and Unified Silla), 9 chapters of miscellaneous treaties (雜志 japji), 3 chapters of chronological tables (表 pyo), and 10 chapters of biographies (列傳 yeoljeon).
Considering the zeitgeist and society of the 12th century, Samguk sagi reflects the efforts to find Korean identity even in the midst of the Chinese-centered trends at that time. Therefore, this book has ingrained the objective narrative attitude of “to narrate but not make history (述而不作),” which is enshrined by traditional Chinese historical studies. In particular, the work has greatly developed the traditional history by contributing to the narration of the history of the early Joseon period, especially the compilation of Goryeosa (高麗史 History of Goryeo), as it established the example of a history compilation called gwanchan (官撰 government compilation) led by the government.
2. Authorship
Kim Busik’s family origin was Gyeongju (慶州), while his courtesy name was Ipji (立之) and his pen name was Noecheon (雷川). His father Kim Geun (金覲, ?-?), wanted to raise his children like the brothers Su Shi (蘇軾, 1037-1101), Su Zhe (蘇轍, 1039-1112) who were writers of great literature in Song Dynasty (宋朝); thus, he named his children Busik (富軾) and Bucheol (富轍) after them.
In 1095 (King Sukjong 1), Kim Busik was appointed to Jikhallim (直翰林) of the Hallim Academy that was responsible for drafting foreign documents after passing the civil service examination. For more than 20 years, he developed his own academics and careers while serving in various positions. He lectured on the Confucian classics to King Yejong (睿宗 r. 1079-1122) and King Injong.
In July 1116 (King Yejong 11), Kim went to the Song Dynasty as an envoy, and on his way back he brought a set of Sima Guang’s (司馬光, 1019-1086) Zi zhi tong jian (資治通鑑 Comprehensive Mirror in Aid of Governance, 1084). In 1127, he went to China again to celebrate the enthronement of Emperor Gaozong (高宗 r. 1127-1129), but the capital was captured by forces of the Jurchen-leading the Jin dynasty (大金 1115-1234) in the Jingkang incident (靖康事變) and moved to the south, so he returned without even visiting the capital.
In December 1130 (King Injong 8), Kim was promoted after he became prime minister. In January 1135 (King Injong 13), he was appointed Regional Military Commander during the Rebellion of Myo Cheong (妙淸亂), and he directly led the army and took charge of the suppression. Before going into the battle, he consulted with the ministers and first cut off the heads of the sympathizers of Myo Cheong, such as Jeong Jisang (鄭知常, ?-1135), Kim An (金安, ?-1135), and Baek Suhan (白壽翰, 1081-1135), in Gaegyeong, the capital of Goryeo at that time. It was only after a year and two months that the rebels could be suppressed. After returning in triumph from Seogyeong [Pyeongyang of today, the second largest city of Goryeo], Kim failed in attempting to demote Yun Eoni (尹彦頤, 1090-1149) and Han Yuchung (韓惟忠, ?-1146). When Yun Eoni and Han Yuchung had the prospect of returning to central politics, Kim filed a resignation appeal three times in fear of political retaliation, eventually obtaining permission from the king.
When his brothers passed away and his friend Jeong Seupmyeong (鄭襲明, 1095-1151) was impeached and retired, Kim also withdrew from the political front in 1142. In his later years, he built Gwallan Temple near Gaegyeong to perform Buddhist practices. After resigning from the government office, the king sent eight young officials to help him to order the compilation of Samguk sagi; and in 1145 (King Injong 23), Samguk sagi was finally compiled. Moreover, he was in charge of the compilation of the “Annals of King Yejong” and the “Annals of King Injong.”
There are about 20 chapters of his collected writings (文集 munjip), but they do not exist anymore. However, many writings have been passed down in Dongmunseon (東文選 Collected Literary Works of the East, 1478) and Dongmunsu (東文粹 Essential Works of the East, 1488). When Kim died at the age of 76 in 1151 (King Uijong 5), he was conferred with the title of secretary-general of the Royal Secretariat (中書令 Jungseoryeong).
3. Work
The narrative method of Samguk sagi imitated Xin Tang shu (新唐書 New Book of Tang). Samguk sagi is composed of records (紀 gi), biographies (傳 jeon), chronological tables (表 pyo), and miscellaneous treaties (雜志 japji); and consists of 28 chapters of annals, 3 chapters of chronological tables, 9 chapters of miscellaneous treaties, and 10 chapters of biographies. The annals consist of 12 chapters of Silla Bongi, 10 chapters of Goguryeo Bongi and 6 volumes of Baekje Bongi.
The annals are more than half of the book and have the largest weight in terms of content. This characteristic is pointed out as a difference from Chinese historical books of a chronicle writing style, which are organized around biographies. Moreover, in the case of describing the external relations of each of the three countries, the Silla Bongi expressed them as “self (我 ah)” with Silla as the subject; and, in the cases of Goguryeo and Baekje, they were expressed in the same manner. This method is unprecedented in the history of Chinese historical books, and it can be said that the method reflects the attitude to describe the three kingdoms equally.
In the annals, the personal information of the king and queen was recorded at the beginning, and then political achievements, natural disasters, natural phenomena, appointment and dismissal events of important officials, war events, and dispatch of envoys to foreign countries were recorded for each year. Among these, it seems that the annals included natural mutations due to the idea that it has a profound relationship with human activities. Moreover, the annual description reveals the four seasons of spring, summer, fall, and winter, which is a Chinese historical description method. In the annals of the three kingdoms, one can understand the horrors of the endless war between the three countries.
In the chronological tables, it was created in contrast to the chronological table of China; however, since the annals of the three kingdoms are all described as the reigning year of each king, it is impossible to grasp the exact period without the chronological table. From the year of Pak Hyeokgeose (朴赫居世, the founding monarch)’s accession (57 B.C.) to the 9th year of King Gyeongsun (敬順王, 935 A.D.), the chronological table is divided into three chapters. The content is poor and simple when compared to the chronological table of Chinese literature which includes counselors-in-chief (宰相表 jaesangpyeo), imperial house (宗室表 jongsilpyeo) provincial defense commands (方鎭表 bangjinpyeo).
The miscellaneous treaties are a description of the governance system in different fields. The reason that the miscellaneous treaties were named as japji (雜誌) is that there are not many materials to describe in the miscellaneous treaties, so several fields were described in a single chapter of miscellaneous treaties. Most of them are about the state of the unification period, focusing on Silla, but it also includes those of the three kingdoms period. The composition is in the order of ritual sacrifices (祭祀 chesa), music (樂 ak), color of official costume (色服 saekbok),·vehicles (車騎 geogi), utensil (器用 giyong), dwellings (屋舍 oksa), geography (地理 jiri), government offices (職官 jikgwan).
Compared to Chinese historical books of a chronicle writing style, it is seen as poor formation because it does not have court rituals (禮 ye), the Five Agents (五行 ohaeng), astronomy (天文 cheonmun), calendar (曆 yeok), food and commodities (食貨 sikhwa). The miscellaneous treaties tried to describe the contents of the three kingdoms, but there was no additional information about Goguryeo and Baekje other than that from the annals; thus, it was just referenced the sources were from Chinese resources.
Compared to Chinese historical books, the ten chapters of biographies are also very poor. Therefore, the figures are not organized according to categories such as eminent officials (名臣 myeongsin), benevolent officials (循吏 sunni), cruel officials (酷吏 hokni), Confucian scholars (儒林 yurim), or traitors (叛逆 banyeok) etc. and there are no biographies of queens or princesses. There are 50 people in total, but reaches a total of 70 if including those introduced by independent people. If classified according to nationality, Silla people occupy an overwhelming majority. And among the Silla people, most of the figures are from the era before the unification. The reason that the proportion of the Silla people is so high in terms of quantity is that there were relatively many resources of the Silla people at the time of compilation.
What is impressive is that Kim Yushin (金庾信, 595-673) has three chapters of personal biographies. In fact, in the case of the Goguryeo people, all of the rest except for the biography of Ondal (溫達, ?-590) were transferred from the Bongi of Samguk sagi or the resources of Chinese literature. In the case of Baekje people, the biography of Heukchi Sangji (黑齒常之, 630-689) was taken from Jin Tang shu (舊唐書, Old Book of Tang), and the biography of Gyebaek (階伯, ?-660) is a slightly amplified version of the Baekje Bongi, and only the biography of Domi (都彌 main character of Domi folk tale) was newly added in the Baekje Bongi. In particular, the enumeration of figuresreflects patriotism towards the countries [the three kingdoms] and is the main focus of the biographies since 34 people were active in the 7th century, and 21 people died for the sake of their countries.
One noteworthy part of the Samguk sagi is a discussion (論贊 nonchan; a form first created by Sima Qian in Shiji (史記)). The discussion refers to the historical treaties that expresses the author’s opinion in historical writing; in the Samguk sagi, both ‘non (論 discussion)’ and ‘chan (贊 eulogies)’ were not distinguished and were both called ‘non.’ In the Samguk sagi, there were 31 discussions; 10 for the Silla Bongi, 7 for the Goguryeo Bongi, 6 for the Baekje Bongi, and 8 for the yeoljeon. The contents are mainly centered on the rule of rites, the Confucian doctrine of governing the people with virtue, and the behavior of ruler and minister. However, it still maintains such a Confucian cause and the moral principle of the Spring and Autumn Annals (春秋大義 chunchu daeui), while taking a realist position that considers our (Korean) reality and uniqueness. For instance, it defended King Naemul (奈勿王 r. 356-402 in Silla dynasty)’ s action that he married a woman of the same last name (同性娶妻 dongseong chwicheo) and King Hyeokgeosae (r. 57 B.C-4 A.D.; founder of Silla dynasty)’s royal touring with the queen.
4. Style and Legacy
Samguk sagi is one of the best books for Korean history compiled by Kim Busik and other people in the 23rd year of King Injong of Goryeo (1145). It is not only of great value as a general historical resource for the study of the Three Kingdoms and Unified Silla history, but also of great significance in that it became an example for historical books compiled after. However, until now, the evaluation of the Samguk sagi was not favorable. This was especially true in the case of nationalist historians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1910-1945). Not only did they recognize Samguk sagi as a typical example of the xenocentrism, but also extremely degraded the historical value of this book and raised strong questions about the factuality of the records. It can be said that the unilateral condemnation of nationalist historians regarding Kim Busik and his book, Samguk sagi, not only caused enormous obstacles to the in-depth study of the book after independence, but also caused considerable harm in the study of the history of the Three Kingdoms and Unified Silla and in establishing the correct perception of history.
Samguk sagi is written mainly on the history of the development of the country; however, it grasps the entire ancient culture as it includes various records on ancient myths and legends, the notion of rituals, faith, religion, life customs, language and written life, art, and detailed description of human life. The narration of the records is described in a conversational form in chapters such as biographies to make the description more engaging and full of excitement. However, it should be noted that there is a possibility that Kim Busik replaced similar contents in order to gain more authority if the expressions mentioned during the conversation were cited from Chinese classics.
Samguk sagi is a comprehensive history book written around political history. Moreover, Kim Busik valued the existing ancient literature and materials. On the other hand, Ilyeon (一然, 1206-1289)’s Samguk yusa (三國遺事 Memorabilia of the Three Kingdoms) was written on the premise of Samguk sagi; thus, it was possible to record things that were not covered in Samguk sagi. While Samguk sagi is a historical book about the rise and fall of the three kingdoms, Samguk yusa shows a difference in that it deals with the state from the Gojoseon period (古朝鮮, ?-108 B.C.) to the end of the Three Kingdoms period. This can be said to be the difference between Kim Busik’s rational view of history and the Buddhist ideology centered on Ilyeon’s theory of dependent origination (緣起 Pratītyasamutpāda).
Ilyeon’s Samguk yusa conveys an ancient story as it is, bringing the ancient times of Korea closer to the original. Moreover, Samguk yusa is very different from the Samguk sagi in that it is a history of the Buddhist faith. However, it is not just a religious history, but a history book that supplements the Samguk sagi, as it conveys many stories about each of the kings of Silla that were excluded from the Samguk sagi.
There is an opinion that understands Samguk yusa as a characteristic of ethnography. This is because it includes very valuable information such as records of Hyangga (鄕歌 native songs or verse produced from Silla dynasty into early Goryeo) during the Three Kingdoms period. However, with the absence of Samguk sagi, Samguk yusa alone cannot restore the history of Korea.
To properly understand the ancient history of Korea, one needs to read the two historical books together. The two historical books can be said to be classics that convey the cultural character of our nation. Only when characteristics of the two classics are properly understood and reinterpreted will one be able to contribute to the creation of our new culture in the future.
5. References and External Links
5.1. References
Goryeosa [高麗史 History of Goryeo]
Goryeosa Jeoryo [高麗史節要 Essentials of Goryeo History]
Dongmunseon [東文選 Collected Literary Works of the East]
Jeong, Gubok, et. al., Yeokju Samguk Sagi [Translated and Annotated History of the Three Kingdoms], vol. 1-5, Academy of Korean Studies, 1987.
Jeong, Gubok, “Kim Busik,” Hanguksa Simin Gwangjwa [Lecture of Korean History] 9, Iljogak, 1991.
Jeong, Gubok, Hanguk Jungse Sahaksa [Korean Medieval Historiography], Jipmundang, 1999.
Jeong, Gubok, et. al., Hanguk ui Gojeon eul Ingneunda [Reading Korean Classics], Hyumeoniseuteu, 2006.
Sin, Hyeongsik, Samguk Sagi Yeongu [Study of the Samguk Sagi], Iljogak, 1981.
Yi, Nanyeong, ed., “Yun Eoni Myojimeyong [Epitaph of Yun Eoni],” Hanguk Geumseokmun Chubo [Supplemented Edition of Korean Inscriptions], Asea Munhwasa, 1976.
Jeon, Deokjae, “Minjokjuui Sahakja ui Samguk Sagi Insik [National Historian’s Perspective of Samguk Sagi],” Yeoksa wa Hyeonsil [History and Reality] 62, Hanguk Yeoksa Yeonguhoe, 2006.
Im, Gihwan, “Samguk Sagi Bongi Gisa ui Gyetongjeok Bokwon eul Seongchwihan Nojak, Jeon Deokjae, Samguk Sagi Bongi ui Wonjeon gwa Pyeonchan [A Laborious Work to Accomplish Systematic Restoration of the Samguk Sagi Bongi, the Original Texts and Compilation of Samguk Sagi, Written by Jeon Deokjae],” Hanguk Kodaesa Yeongu [Journal of Korean Ancient History] 92, Hanguk Kodaesa Hakhoe, 2018
5.2. External Links
[Encyclopedia of Korean Culture], Samguk Sagi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6478
[Daum Encyclopedia], Samguk Sagi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b11s1799b003
6. Works in Translation
6.1. Russian
Pak, Mikhail Nikolaevich, transl., Samkuk Sagi: Letopisi Silla, Moskva: Vostochnaia Literatura RAN, 2001.
6.2. Vietnamese
Lee, Kanglae and Nguyễn, Ngọc Quế, transl., Tam Quốc Sử Ký, Hà Nội: Nhà xuất bản Phụ Nữ, 2017.
6.3. Japanese
Kim, Shika, transl., Kanyaku Sangoku Shiki, Tokyo: Akashi Shoten, 1997.
Translated Books4 See More
-
Vietnamese(Tiếng Việt) Funded by LTI Korea AvailableTAM QUỐC SỬ KÝ IKim Busik et al / Kim Phú Thức / 2017 / KDC구분 > History